습관적으로 손을 들어 목을 쓸어내리자 까슬까슬한 감촉의 밴드가 느껴졌다. 내가 초등학생에서 중학생이 되고,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이 될 때까지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밴드였다. 딱히 아프거나 다친 상처가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밴드 아래에 있는 주인을 알 수 없는 이름을 가리기 위해서였다.
그 이름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내 왼쪽 목 언저리에 새겨져 있었다. 한때는, 뭐라고 적혀있는지 알아볼 수 없는 그 이름의 주인을 찾고 싶어했던 적도 있지만, 지금도 그러냐고 묻는다면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도 아니고. 알고 싶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닌 이름에 어쩌면 체념한 걸지도 모르지.
“어? 다쳤어?”
“파스 붙인 거 아니야?”
그러나 내가 가린다고 해서 세상 사람이 그걸 모르게 되는 건 아니다. 머리카락으로 가리기에도 모호한 위치에 있는 밴드 덕에 처음 만나는 사림이면 한 번씩은 꼭 그 존재를 짚고 넘어갔다.
“그냥 화상 흉터가 좀 크게 있어서요.”
괜히 손으로 목덜미를 쓸고 시선을 내리깔면서 말하면 그 뒤로 탄식이 뒤따라왔다. 괜히 망설여봤자 끈질긴 추궁만이 이어진다는 걸 깨달은 후 터득한 일종의 처세술이다. 괜한 말을 꺼냈다는 듯 입을 틀어막은 사람과 눈치를 보는 사람 그리고 나 사이에 어색함이 내려앉았다. 한때는 이 어색함이 싫어서 끝까지 입을 다물었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우리 짠-할까요?”
술이 들어가면 분위기는 달아오르기 마련이니까. 어어. 그래, 그러자. 선배 한 명이 내 말에 동조했다. 잔이 부딪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밴드 아래에 무엇이 있는가에 관한 이야기는 기억에 남지 않을 만큼 사소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게 뭔지 궁금했던 저 사람들에게서도. 뭐가 있는지 알고 있는 나에게서도.
-Un-Destiny
w. 이요(@sh_tooth)
“확인 안 하세요?”
자꾸 깜빡이는 화면에 핸드폰을 엎어버리자 아카아시가 물었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라서 괜찮아.”
얼핏 바라본 화면에 뜬 사람은 과대였다. 안 봐도 며칠 전부터 오라고, 오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한 신입생 환영회 관련 일 때문인 게 분명하다. 안 간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귓등으로도 안 듣고 왜 안 오냐고 연락하는 건 무슨 심보냐고.
자꾸 깜빡이던 화면을 덮어버리자 한결 편안해졌다. 눈앞에는 집중해서 문제를 풀고 있는 아카아시가 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벌써 아카아시가 3학년에 센터시험을 준비한다는 게 새삼스럽지만 놀라웠다.
“3학년이 돼서도 부 활동은 계속한다고?”
“네.”
“올해부터 주장이라고 했었지.”
“네.”
“어때?”
“뭐, 별 차이는 없어서...”
말끝을 흐리는 아카아시에 금방 이전 주장이라던 사람이 떠올랐다. 분명 텐션은 엄청나게 높은데 기분을 엄청 타는 사람이라서 고생했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하긴 그런 주장을 보필하던 부주장이니 오히려 편해졌을지도 모르겠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아카아시가 푼 문제를 채점하고 틀린 문제에 대해 설명하다 보니 어느새 2시간에 가까운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오늘따라 좀 더 지쳐 보이는 아카아시의 모습에 일찍 마쳐주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꽉꽉 채운 수업이 되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
지칠 대로 지친 표정을 지은 아카아시가 내게 인사했다. 늘 덧붙이던 인사말을 붙이고 짐을 챙기는데 순간적으로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뒤에서 누가 놀라게 한 것처럼 펄떡거리는 심장에 순간 몸을 앞으로 웅크렸다.
“...어디 불편하세요?”
아카아시가 물었다. 여전히 요동치는 심장에 가슴께를 움켜쥐며 천천히 자세를 바르게 했다.
“어, 어. 좀 피곤해서 그랬나 봐.”
당황스러운 감정을 숨기고 짐을 마저 챙겼다. 아무래도 상태가 이상했다. 점점 더 커지는 소리에 아카아시의 소리마저 멀게 느껴졌다. 점점 멀어지는 아카아시의 소리와는 달리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는 더욱 커졌다. 다시 한번 쿵 하고 느껴지는 충격에 천천히 손을 움직여 밴드 위를 쓸어내렸다. 심장에서부터 느껴진 충격이 아니었다.
걱정어린 표정의 아카아시가 내 앞으로 다가옴과 동시에 방문이 열렸고 그에 맞춰 무언가에 홀린 듯 고개를 돌렸다. 나를 부르던 아카아시의 목소리를 비롯한 모든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든 색이 희미해져 갔다.
마치 너와 나, 둘만이 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내 인생에 없을 거라 단정 지었던 순간이다. 저 사람이 내 운명이다. 부모님이 줄곧 내게 말했던, 겪으면 어쩔 수 없이 서로에게 마음을 뺏기고 네임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던 그 감각이 온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네임을 보유한 자들이 일생에 단 한 번 겪는다는 황홀함에 정신을 빼앗겼다.
목 언저리에서는 늦게 만난 운명을 반기듯 뭉근한 열기를 흘렸다. 영원 같던 순간이 지나고 서서히 희미했던 색이 돌아오며 멀어진 소리가 다시 돌아왔을 때, 내 눈앞을 왔다 갔다 하는 손이 보였다.
“선생님, 선생님!”
아카아시가 내 어깨를 흔들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괜찮아. 내 입에서 힘없는 소리가 새어나갔다. 전혀 신빙성이 없는 내 모습에 아카아시는 나의 짐을 마저 챙겨 넣으며 나를 부축했다. 아카아시의 뒤로 살짝 보이던 너는 일어나는 내 모습에 놀라며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은 이름에서 느껴지는 감정과 화끈한 열기에 비틀거리며 계단을 내려오자 거실 소파에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있는 그 사람이 보였다. 꿋꿋하게 정면만을 응시하는 모습에 천천히 다리를 움직여 밖으로 이동했다. 안 그래도 괜찮은데 택시까지 잡아준 아카아시에게 고맙다는 말을 내뱉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서자 썰렁한 공기가 느껴졌다.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집에 이사 갈 날만을 벼르고 있었는데 오늘따라 차가운 바람이 반가웠다. 거울 앞에 앉아서 반창고에 손을 갖다 대자 뜨거운 열기가 훅 느껴졌다. 조심스레 끄트머리를 잡고 뜯어냈다. 그러자 또박또박 적혀있는 이름이 보였다. 그 얇은 것으로 어떻게 가려졌는지도 모를 만큼 크고 선명하게.
木兎 光太郎
너의 이름이구나. 꽤나 엉망인 투박한 필체였지만 그럼에도 알아볼 수 있었다. 손가락을 움직여 이름 한 글자 한 글자를 쓸어내렸다. 보쿠토 코타로. 빛나는 너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봤던 그 금색 눈은 마치 태양처럼 빛나고 있었으니까.
너와 마주친 순간은 1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너를 담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눈을 감으면 금방 그 순간이 그려졌다. 활짝 열어젖힌 문 손잡이를 잡고 놀란 표정을 짓던 너의 모습과 동시에 걱정 그 이상의 감정은 담겨있지 않은 눈이 보였다. 감고 있던 눈이 번쩍 떠졌다.
운명의 상대를 만났다고 하기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 그걸 잊고 있었네.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던 나와는 달리 안절부절못하며 시선을 제대로 두지 못하던 보쿠토의 모습이 생각났다. 누군가 말해주지 않았지만 알 수밖에 없었다. 너에게는 나라는 운명이 없는 것 같다는 걸.
*
첫날인데 설마 수업하실까. 새로 시작된 학기에 바뀐 시간표를 따라 강의실로 들어가자 아직 어수선해 보이는 보였다. 대충 뒷자리에 자리를 잡고 태블릿을 꺼냄과 동시에 아무것도 안 들고 강의실로 들어오는 교수님의 모습에 조금의 희망이 보였다. 그리고 그 희망은 교수님이 피피티를 켬과 동시에 사라졌다.
인자한 인상의 교수님은 외관과 달리 자비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 첫날부터 3시간 꽉꽉 채워서 수업을 진행하겠다는 말에 조용히 핸드폰 화면의 녹음기를 찾았다. 이건 절대 내가 수업을 견디지 못하고 잘 것 같아서가 아니라 수업 내용을 정확하게 복기하기 위해서라고. 수업 시간이 1시간쯤 지나고 중간 쉬는 시간을 주겠다는 말에 책상 위로 몸을 늘어트렸다. 철회할까? 수업 첫날에 든 생각이다.
“어?”
각자 휴대폰만 하는 정적 속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바로 내 옆에서.
“어제…. 아카아시 과외 선생님?”
반가운 얼굴로 나를 부른 사람은 보쿠토 코타로였다. 습관적으로 왼쪽 목덜미를 쓸어내리자 왜 눈치채지 못했나 싶을 정도로 화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마구 날뛰는 감각을 무시하며 아는 체를 하자 활짝 펴지듯 웃은 보쿠토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괜찮으세요?”
“네?”
“아카아시가 어제 돌아와서도 계속 걱정했거든요.”
아카아시의 얘기를 시작으로 나에게 어디가 아팠던 거냐, 원래 자주 아프냐는 등 걱정 어린 말을 하는 너의 모습에 웃음을 내비치는 스스로가 낯설었다. 낯을 많이 가려서 처음 보는 사람이랑은 대화도 안 나누고 불편해하는 사람이 나인데, 그런 보쿠토의 모습은 불편하기는커녕 사랑스럽기만 해서 웃음이 저절로 지어졌다.
“아, 저는 보쿠토 코타로예요.”
알고 있었지만, 본인 입으로 듣는 이름은 특별했고 또, 소중했다. 내 이름의 주인은 네가 맞았다. 올해 갓 입학한 새내기의 느낌이 났던 보쿠토는 아니나 다를까 신입생이었고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살짝 미소를 짓는 모습이 귀여웠다.
“신입생인데, 지각하고.”
두근대는 심장 소리가 들릴까 말소리를 키웠다. 그 말에 부끄러움과 학교에 대학에 들어왔다는 설렘으로 요동치는 너의 감정이 네임에서부터 어렴풋이 느껴졌다. 운명이란 뭘까. 대체 그게 뭐길래 이렇게 단시간에 마음을 뺏기게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선배는 이다음에 뭐 들으세요?”
수업이 끝나고 가방을 챙기는 내게 보쿠토가 물었다.
“전공.”
시계를 확인하며 대답했다. 나름의 양심으로 교수님이 20분 정도 일찍 끝내준 덕에 시간은 넉넉했다. 아. 옆에서 아쉬운 소리가 들렸다. 보쿠토가 무슨 수업을 듣는지는 모르겠지만, 겹치지 않는다는 건 확실했기에 가방을 들쳐메고 강의실을 나섰다.
“아쉽네요.”
한 걸음 내 옆으로 다가오는 보쿠토에 맞춰 한걸음 물러나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직은 이 정도가 적절하다.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는 보쿠토에게 인사를 건넸다. 더 있다가는 쿵쿵대는 이 소리가 보쿠토의 귀까지 들릴 것만 같다. 손을 살랑 흔들고 빠르게 뒤를 돌았다.
그러나, 북적이는 학생들 틈 속에서 보쿠토와 멀어지고자 발걸음을 옮긴 나는 곧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나를 붙잡는 목소리가 들린다. 수많은 소음 속에서도 보쿠토의 목소리는 선명했다.
“-배. 여주 선배!”
“...왜?”
“번호 좀 주세요.”
나에게 당당하게 번호를 요구하는 보쿠토의 모습에 아까보다 더 쿵쾅거리는 심장께를 꾹 눌렀다. 나대지 마, 제발.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별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지금은 이 소리가 보쿠토에게 들리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손에서 핸드폰을 받아 빠르게 번호를 찍고 후다닥 학과 건물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짧게 맞닿은 손에 떨리는 내 마음이 너에게로 새어나갈까 봐.
*
강의 시간을 한참이나 남겨놓고 도착한 강의실은 당연하게도 아무도 없었다. 존재감을 드러내듯 열기를 뿜어내던 이름도, 세상이 떠나가라 쿵쾅거리던 심장도 조용한 분위기 속에 녹아 점차 고요해졌다.
웅-
고요해진 강의실에 진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보쿠토 코타로]
선배
저 보쿠토예요.
혹시 수업 끝나고 다른 약속 있으세요?
아니
약속 없어
그럼 저랑 같이
점심 드실래요?
이성을 가뿐히 앞질러버린 감정에 얼떨결에 잡힌 약속에 집에서 쉬려던 계획을 휴지통에 처박아버리고는 너를 기다렸다. 저 거의 다 왔어요! 오타투성이인 메시지를 해석해보면 저 내용이 분명한데. 그 문자 뒤로 곧바로 우는 부엉이 이모티콘이 보였다. 이모티콘도 꼭 자기랑 똑같은 걸 쓰네….
“제가, 늦었죠.”
내 앞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슬쩍 고개를 올리자 호흡을 가다듬는 보쿠토가 보였다.
“아냐, 나도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어.”
사실 족히 15분은 기다렸지만, 별로 길게 느껴지지 않았으니 거짓말은 아니지. 스스로 합리화를 하면서 보쿠토를 올려다보자 아까 지었던 맑은 웃음을 지은 보쿠토가 나를 이끌었다.
“밥 먹으러 가요.”
근데 근처에 어디가 맛있어요?
“...따라와,”
정작 어디가 맛있는 곳인지 모르는 보쿠토를 데리고 학교 인근 맛집으로 들어왔다. 점심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눈을 반짝이며 메뉴판을 본 보쿠토가 이것저것 고민하더니 덮밥 3개를 시켰다.
“...그거 다 먹을 수 있어?”
“네?”
뭐가 이상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에 말을 얼버무렸다. 여기 양 많을 텐데…. 여전히 당황한 눈으로 나를 보는 직원에게 내 몫의 메뉴까지 말했다. 주문을 끝내고 정적이 감도는 상황이 어색해서 눈동자를 데굴 굴리는데, 보쿠토가 먼저 말을 꺼냈다.
“선배, 선배는 언제부터 과외 하셨어요?”
“음, 아마 2년 전부터? 왜?”
“아뇨, 그냥 아카아시가 과외를 한다는 게 신기해서….”
대체 아카아시의 이미지가 어땠길래…? 혼자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지 인상을 구겼다가 창백해졌다가 고개를 좌우로 저은 보쿠토가 대뜸 내게 엄지를 치켜세우며 대단하다고 칭찬했다.
“아카아시랑 친해?”
보쿠토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친해졌는데? 그 질문을 시작으로 어색할 줄만 알았던 식사는 웃음꽃이 가득해졌다. 중간마다 공백이 생길 때는 어색한 게 없지 않았지만, 네임에서부터 선명하게 즐겁다는 너의 감정이 느껴져서 그마저도 좋았다.
네가 좋으면 됐지 뭐. 활달한 성격 덕분인지 대화는 금방금방 여러 주제로 넘어갔고 아카아시로 시작되었던 과외 선생님과 고교 선배의 대화는 어느새 대학 얘기로, 사소한 일상 속 얘기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식사가 끝난 뒤 보쿠토가 자신이 약속을 잡았으니 계산하겠다고 지갑을 꺼내는 손길을 막았다.
“1학년한테 얻어먹을 만큼 쓰레기 선배는 아니라서.”
진짜 이유를 뒤로 숨기며 멋진 선배 가면을 내세웠다. 내가 계산한다고 말하면,
“제가 사도 괜찮은데…. 다음에는 제가 살게요.”
이 말이 나올 테니까. 다음 만남을 먼저 잡을 용기는 없지만 만나고 싶은 나의 얕은 수이다.
*
다음을 기약하는 약속을 한 바로 다음 날, 보쿠토가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나를 잡았다. 그렇게 약속을 잡은 지 하루 만에 너와 나는 또다시 밥을 먹게 되었고 이후에도 너는 수업이 끝나는 시간이 겹칠 때면 늘 학과 건물 앞으로 찾아와 자연스레 나를 이끌었다.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은 일주일이 되었다.
“선배 다음 주에 바쁘세요?”
“다음 주? 다음 주 언제?”
평소처럼 집으로 가는 길, 잔뜩 긴장한 채로 다음 주 일정을 물어오는 보쿠토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요일이요.”
수요일이라면 전공 2개인가. 못 가겠는데…?
“음, 6시부터는 한가할 거 같은데?”
내 대답에 보쿠토가 눈에 띄게 풀 죽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왜??? 당황한 내가 보쿠토에게 묻자 보쿠토가 경기를 보러 와줬으면 했다고 말했다. 풀죽은 보쿠토를 달래려면 경기를 보는 게 최고겠지만, 솔직히 3학년이 전공 수업을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난감한 상황인걸. 최대한 머리를 굴려서 보쿠토의 기분을 올릴 주제를 떠올렸다.
“축제…! 축제 때는 안 바빠.”
다음 주 일정 중, 축제랑 겹치는 날 경기가 있음을 생각하고 다급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경기랑 축제가 겹친다고 툴툴대던 보쿠토를 기억해낸 나, 아주 칭찬해. 내 말에 다시 화악 밝아진 보쿠토가 '그럼 저랑 축제 때 같이 다녀요!'라고 외쳤다.
“어? 그때 경기 보러 오라는 게 아니라?”
“경기도 보고, 축제도 같이 다녀요.”
“음…. 나랑 다니면 재미없을걸? 친구들이랑 다녀.”
꼭 데이트 신청처럼 들리는 그 말에 심장이 또 두근거렸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너의 말 하나에도 내 마음은 이리저리 흔들렸다. 은근히 거절을 내포한 내 말에 평소라면 아쉬운 티를 내더라도 포기했을 보쿠토가 싫다고 말했다. 몇 번이고 고집을 꺾지 않는 모습에 결국 포기를 하게 된 건 보쿠토가 아닌 나였다.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학교 축제 당일, 만나기로 한 체육관에 가까워지자 문앞에 서서 두리번거리는 보쿠토가 보였다.
“보쿠토.”
“선배!”
“너 나와 있어도 괜찮아?”
처음 보는 경기복을 입은 보쿠토의 모습에 잘 어울린다고 마구 칭찬하자 보쿠토가 팔을 옆구리에 붙이며 당당한 자세를 취했다. 그마저도 귀엽기만 한 게 진짜 중증이 따로 없네. 곧 시작하는 경기에 보쿠토를 선수용 대기실 쪽으로 밀어 넣고 2층 관중석으로 이동했다.
확실히, 보쿠토가 유명한 선수인가 보다. 보쿠토의 등장에 관중의 환호 소리가 확 커진 걸 보면 말이다. 악수를 한 양 팀이 코트 위에 서자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고 경기가 시작되었다. 열광하는 소리와 함께 코트 위를 누비는 보쿠토가 보였다. 경기를 뛰는 그 애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날개를 단 듯 훨훨 날아다니는 보쿠토는 상상 이상으로 찬란했다.
*
“생각보다 고등학교 때랑 큰 차이는 없네요?”
“왜, 큰 차이 있잖아,”
“뭐가요?”
“술이 있잖아.”
“아.”
경기를 끝내고 나온 보쿠토와 주점 거리를 걸었다. 근데 너 운동선수라서 술 못 먹잖아. 불쑥 올라오는 장난기에 보쿠토를 놀리자 생생한 반응이 돌아왔다. 한 모금 정도는 괜찮거든요? 주점에서는 맥주 한 모금을 안 팔 텐데? 내 말에 실시간으로 변하는 보쿠토의 표정을 보다가 더 놀렸다가는 삐칠 것 같은 보쿠토에 팔을 잡고 주점 안으로 들어갔다.
주점 안은 생각보다 덥지는 않았다. 저녁이라 그런지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시원했다. 에어컨이 틀어져 있던 경기장만 하지는 않았지만, 이만하면 준수하지. 선풍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시켜뒀던 에이드를 한 입 먹자 나를 보고 있었던 건지 그대로 보쿠토와 시선이 마주쳤다.
“ㅇ,왜?”
“선배,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뭔데...?”
“...목에, 상처예요?”
갑작스러운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슬쩍 시선을 내리자 항상 목덜미를 가리고 있던 머리카락이 뒤로 넘어가 있었다. 이상하지. 주변에서 다른 사람들이 물어올 때는 흉터 때문이라고 넘어갔었는데, 너의 질문에는 입이 딱 다물리며 떨어지지 않았다. 도저히 거짓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상처는 아니야.”
“네?”
“상처가, 아니라….”
“...”
네가 내 네임이어서 그런 걸까, 아까부터 평소와는 달리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감각이 꼭 자기를 알아달라 소리치는 것만 같았다. 후회할 거야. 이성이 경고했다. 상관없어. 마음이 외쳤다. 나를 죄어오는 감각 속 내 마음은 온전히 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운명이 되고 싶은 걸까.
천천히 옥죄어 오던 이름으로부터의 감정이 한순간 나를 잡아먹었다. 지금 내가 느끼는 불안이 내 감정인지. 네가 느끼고 있는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몰려오는 감정의 파도에 정신을 붙잡으면 올곧게 나를 바라보는 황금색 눈동자가 눈앞에 나타났다. 마주치는 눈 속에 보이는 나는 한 손으로 네임을 가리며 울 것 같은 얼굴로 너를 바라본다.
“알고 싶어?”
보쿠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운명이야.”
“...”
“내가 가진 유일한 운명.”
한평생을 가려져 있던 이름 위로 굵은 손길이 닿았다. 천천히 떼어지는 밴드의 감촉이 느껴졌다. 동시에 불안이 덜컥 나를 붙잡았다. 싫어하면, 어떡하지?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다.
밴드가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까칠까칠한 손가락이 이름 위를 쓰다듬었다. 조심스럽고 애틋하게. 성부터 이름까지 천천히 훑고 지나간 손가락이 떨어지고 나를 보는 보쿠토의 얼굴에 가득 찬 것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기쁨이나 행복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환희라는 감정보다도 강렬한 감정이 나를 덮쳤다.
“다행이다.”
그렇게 말한 보쿠토가 입고 있는 와이셔츠의 두 번째 단추를 풀더니 오른쪽으로 확 젖혔다. 내 이름이다. 거짓말처럼 보쿠토의 오른쪽 쇄골에 적혀있는 저 이름은, 내 이름이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내 이름을 문질렀다. 지워지지 않고 선명한 흔적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했다.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나만 너를 운명이라 여기는 줄 알았다. 나만 너를 사랑한다 생각했다.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감각을 느끼게 해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몇 번이고 이름을 더듬는 내 손을 붙잡은 보쿠토가 손가락 끝에 가볍게 입술을 맞댔다.
“선배.”
“...”
자꾸만 새어나가는 울음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보쿠토는 상관없다는 듯 조심스레 나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고마워요.”
“ㅁ,뭐가, 흑. 고마,운데?”
“나를 선배의 운명이라 말해줘서.”
“...”
“그리고 내 운명이 되어줘서.”
고마워요. 보쿠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머리 위로 펑- 하고 폭죽이 터졌다. 밝아진 눈앞으로 선명한 내 이름이 보였다. 너에게도 나라는 운명이 각인되어 있었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귓가로 울려 퍼졌다. 지금 나를 가득 채운 기쁨이 너의 감정인지 나의 감정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우리는 운명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