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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찰나의 연속이라고 했던가. 내가 그 애를 처음 보게 된 것도 아주 짧은, 단편적인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 애의 첫인상은 찰나의 순간에 본 거라고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참 강렬했다. 검은색의 구불거리는 머리카락도, 새까맣게 빛나는 눈동자도, 하얗고 조그마한 얼굴도, 그 무엇하나 특별한 게 없었는데, 그럼에도 강렬하게 남은 건 어째서인지 궁금했다. 단지 수려하고 예쁜 외모 따위가 아닌 본능적인 이끌림 같은 게 있었다고 해야 하나. 감각적인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에 아직도 못 잊고 있는 걸 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지천에 널리고 널린 요소들이 비로소 하나로 모였기 때문에, 그 애였기 때문에 특별하게 보였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강렬하게 남았던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나는 어쩌면, 그 애를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아했던 게 아닐까, 하고⋯


 

⋯⋯.






 

찰나의 순간

w. 이아(@laxxxxn)

 

 

 

 

“야, 너 진짜 걔랑 아무 사이 아니야?”

 

“아니라니까. 그냥 친구야, 친구.”

 

“이상하다. 친구일 리가 없는데⋯? 분명 뭔가가 있을 텐데?”


 

이 말도 벌써 50번은 더 들은 것 같다. 소파에 머리를 툭 기대며 속에 있던 한숨을 끌어모아 푹 내쉬었다. 이젠 이런 진부하고 이상한 오해를 듣는 것도 진저리가 날 것이다. 물론 내가 아니라 사쿠사 키요오미 쪽이. 아무래도 마음에 없는 상대, 그것도 소꿉친구와 엮이게 되면 분명 불편할 테니까. 모르거나 친분이 없는 쪽이라면 무시하거나 가볍게 넘길 텐데 상대가 나니까 문제다. 난 사쿠사 키요오미의 단 하나뿐인 소꿉친구니까.

 

물론 나는 이런 소문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그야, 그 말은 남들 눈에 우리가 다정한 연인 사이로 보였다는 뜻이니까. 남들이 오해할 정도로 퍽 가까운 사이라는 거니까. 흔한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우리가 아슬아슬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환상에 들게 하니까.

 

물론 이러한 감정을 단 한 번도 티 내거나 드러낸 적은 없었다. 사쿠사 키요오미가 싫어할 게 눈에 훤하니까, 친구보다 못한 사이가 되는 건 정말 싫었기 때문이었다. 사쿠사가 너를 좋아할 수도 있는 건데, 왜 혼자 오해하고 있는 거냐고 물어보면 반박할 수도 있다. 나랑 사귀냐는 장난스러운 물음에 정색하고 절대 아니라며 선을 긋는 사쿠사 키요오미를 바로 옆에서 봤기 때문이다. 솔직히 마음이 아플 법도 한데, 음⋯⋯ 워낙 기대를 안 해서 그런가. 속이 조금 따끔했던 것 빼고는 다 괜찮았다. 정말로.

 

어쨌든, 그 덕에 좋아하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기를 써서 지금까지 속이고 있는 것이다. 원래부터 연기에 재능이 있던 덕분에 그 사쿠사 키요오미를 속이는 건 꽤 쉬운 축에 속했다. (물론 이상함을 느낀 키요오미가 의심을 여러 번 하긴 했지만⋯⋯. 들킨 적은 없으니 괜찮다) 솔직히 짝사랑만 하는 건 많이 힘들긴 하지만⋯ 뭐, 나만 감정을 숨기면 이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거고? 만약 사귄다 하더라도 헤어지면 친구도 못 되는 관계보다는 나은 거니까 상관 없다. 게다가 짝사랑만의 묘미 같은 것도 있고⋯⋯

 

결론적으로는 나는 이 관계에 대해 만족하고 있는데⋯ 요즘 무언가가 좀 이상하다. 뭐라고 해야 하지. 으음, 그러니까⋯⋯


 

“여기에 있었어?”


 

언제 온 건지 내 옆의 의자를 빼고 앉는 키요오미를 보며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애들이 언질도 안 해준 건가 싶어서 급하게 고개를 돌려보니 옆에 있던 아이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키요오미만이 남아있었다. 어떻게 말도 없이 사라질 수가 있는 건지 배신감이 느껴져 핸드폰을 뒤져보니 메세지창에는 미안하다는 짤막한 글이 여럿 도착해있었다.

 

한숨을 쉬고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다음 키요오미를 쳐다보았다. 가끔 소리소문없이 가까이에 오면 심장이 떨어질 정도로 놀라곤 하는데, 키요오미는 내가 그런 거에 잘 놀란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기척 없이 다니곤 한다. 몇 번이나 인기척을 내라고 설득하고 난리를 쳐대도 들어먹을 생각을 안 하니 이건 이거대로 문제였다.

 

내리깐 시선이 몸에 닿자마자 고개를 돌리곤 옆에 있던 짐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옆에서 키요오미가 이런저런 말을 걸었지만 애써 무시하며 테이블 위에 있는 노트를 가방 안에 넣고 몸을 일으켰다. 키요오미에게서 낯선 행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왜 전화를 안 받아? 네 번이나 했는데.”

 

“아⋯⋯ 미안. 무음이라 확인을 못했네.”

 

“그러게 내가 무음으로 두지 말랬잖아.”

 

“저기⋯⋯ 이걸 내가 사과해야 돼? 내 핸드폰인데? 무음으로 두는 건 내 자유 아니야?”


 

순간 울컥해져서 째려보고 말하니 키요오미가 놀란 눈치를 하며 눈을 크게 떴다. 아마 책임을 묻거나 탓하려고 한 건 아닌가 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서는 마치 죄인이 돼서 취조를 받는 기분인 걸. 아마 여기가 카페가 아닌 검은색 벽지가 잔뜩 둘러져있는 사쿠사네의 서재였다면 정말 취조를 받는 죄인이 되었을 거다. 서재에 있지 않았던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건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이번에도 어김없이 키요오미의 변명 아닌 변명이 들려왔다.


 

“그런 뜻으로 말하려던 게 아니라⋯⋯.”


 

키요오미 답지 않은 당황한 듯한 말투가 묻어나왔다. 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쯤 되니 이 뒤에 이어질 말이 듣고 싶지 않아 야, 야, 잠깐- 라는 말을 덧붙이며 키요오미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뒤였다. 나는 목덜미를 잡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걱정돼서 그런 거였어. 화났다면 미안해.”


 

그래, 바로 이게 문제인 거라고! 그 사쿠사 키요오미가 나한테 사과를 하다니. 그 사쿠사 키요오미가 축 처진 듯한 목소리를 내다니⋯! 어릴 때부터 봐왔던 나뿐만이 아닌 모토야나 이이즈나 선배가 봤더라면 기겁했을 모습을 하니 그 누가 안 놀랄 수 있겠느냐고?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모습에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고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만 벌써 몇 번째 한숨을 내쉬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조금 전에 걱정 어쩌구~ 라고 말한 순간부터 이미 심장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뛰기 시작했다.

 

이쯤 되니 아까 앞서 언급했던 이상함을 눈치챈 사람도 있겠다. 요즘 내가 사쿠사 키요오미를 보기 꺼려하는 이유, 틈만 나면 피해 다니는 이유⋯ 웬만하면 닿지도 않으려는 이유⋯⋯


 

그러니까, 그 이유는 바로⋯⋯.


 

사쿠사 키요오미가 눈에 띄게 이상해졌기 때문이었다!





 

***




 

좋아하는 사람이 다정하게 대해주는데 싫어할 사람이 전 세계에 몇이나 될까? 좋아하는 사람의 다른 면을 보고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분명 설렐 만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내 딴에는 전혀 반갑지가 않다.

 

가끔 나만 아는 모습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내가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다고 착각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기쁘거나 설레기보단 기분이 불쾌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냥 친구 사이로 만족하려는데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지 잘 모르겠다. 가끔 내게만 다정하게 구는 사쿠사 키요오미를 보면 욕심을 내고 싶어지기도 하니까.

 

그 덕분에 더도말고 덜도말고 딱 친구로만 지내자! 는 내 의지는 가볍게 무너지고 있는 중이다. 정신 차리고 진정하자고 두 뺨을 때려도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었고. 나름대로 대책을 세워도 키요오미에겐 통하지 않으니 걱정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

 

예를 들어 ‘키요, 부탁인데 나랑 좀 떨어져서 다니면 안 돼? 다른 애들이 오해한단 말이야.’라고 말해도 ‘너는 나랑 오해받는 게 그렇게 싫어?’라고 해서 사람 말문을 막히게 만든다거나, ‘다른 애들한텐 안 그러면서 왜 나한테만 그래?’라고 물어보면 ‘너랑 다른 애들이랑 같아?’라고 해서 어처구니없게 만든다거나. 이런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니 설득하고 말로 타일러도 달라지는 게 없어져 결국 포기하게 되었다.

 

게다가 대답을 꼭 저렇게 애매모호하게 해서 사람 기분을 싱숭생숭하게 만든다. 혹시 쟤가 나를 좋아하는 건가 싶다가도, 바로 엊그제 친구로부터 ‘너 쟤랑 사귀어?’라는 말에 짜증이 팍팍 묻어나오는 얼굴로 ‘내가 걔랑 왜 사귀는데?’라는 대답을 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하다못해 기쁘기라도 해야 하는데 마음 놓고 기뻐할 수가 없다는 소리다.

 

그래서 더욱 이해가 안 갔다. 왜 나보고 너랑 오해받는 게 싫냐고 물어보는 거야? 오히려 오해받기 싫어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너잖아. 그러면서 왜 그렇게 애매하게 대하는 거야? 오해할 수밖에 없게 하는 건 도대체 왜 그런 거냐고. 전하지도 못할 말들이 허공을 맴돌며 머릿속을 어지럽히기 시작한다. 두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니 옆에서 무슨 일이 있냐고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냐. 그나저나 여기까진 웬일이야? 무슨 일 있어?”

 

“그냥. 저녁은 먹었어?”

 

“어? 아직⋯⋯ 안 먹었는데⋯. 왜?”

 

“그럼 밥 먹으러 가게 일어나.”


 

? ?? ⋯⋯?? 순간 어안이 벙벙해져 자리에서 일어나는 키요오미를 두 눈 크게 뜨고 쳐다보기만 했다. 설마 하려던 말이 밥 먹으러 가자는 말이었어? 갑자기 무슨 밥을 먹자고 이러는 거지? 전부터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왜 자꾸 알 수 없는 행동들을 하는 거냐고?

 

태연하게 몸을 일으키고는 나를 쳐다보며 안 일어나냐는 물음을 던지는 과정이 지극히 자연스럽다. 어안이 벙벙한 거고 뭐고 일단 키요오미의 말에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아무 말도 없이 카페 문을 열고 나가는 키요오미를 보니 이쯤 되면 또다른 의문이 생긴다. 얘가 진짜 뭘 하려는 거지. 혹시 뭐를 잘못 먹었나, 같은 자잘한 의문 말이다.


 

“갑자기 무슨 밥을 먹자고 이래?”

 

“전에 파스타 먹고 싶다고 했잖아.”

 

“야⋯⋯ 그거 3주 전에 말한 거 알지? 그땐 아무 말도 안 했으면서 갑자기 왜 이래? 뭐 잘못 먹었어?”


 

어이가 없어서 따지듯이 물어보니 갑자기 발걸음을 멈춰 우뚝 서는 키요오미 때문에 덩달아 나도 우뚝 멈춰버렸다. 설마 방금 그 말 하나 했다고 삐진 건가 싶어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몸을 앞쪽으로 기울였다. 길 한복판에 가만히 서서 몇 초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키요오미는 몸을 돌린 후 나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싫어?”

 

“아니, 누가 싫다고 했나⋯⋯. 그냥 좀, 음, 뭐랄까. 이상해서 물어본 거야.”

 

“⋯⋯뭐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니 별안간 펴져있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평소 같았으면 아마 이 뒤에 이어질 말로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거나, “내가 너보단 나으니까 조용히 해.”라는 말이 나왔을 테지만, 오늘은 아마 다른 답을 내놓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앞서 말했듯이 사쿠사 키요오미는 지금 이상 현상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작게 심호흡을 한 뒤 발걸음을 옮겨 키요오미의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이제 키요오미가 겪고 있는 이상 현상의 원인을 찾을 때가 된 것이다.


 

“요즘 갑자기 나한테 잘해주는 것도 이상하고⋯ 갑자기 사람이 오해할 만한 뉘앙스로 말을 하지 않나⋯⋯ 그냥 다 이상해. 내가 알던 사쿠사 키요오미가 아닌 것 같아.”

 

“⋯⋯.”

 

“음, 그래서 이런 말 하기 좀 부끄럽지만⋯ 자꾸 눈에 띄게 이러니까⋯ 얘가 날 좋아하나, 이런 생각도 해 봤거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니 행동거지는 수상하기 짝이 없고⋯ 난 궁금한 거 있으면 못 참는 성격이잖아.”


 

그래서 물어본 거야, 그래서. 뒤늦게 입술에서 튀어나온 말은 허공을 가르고 이내 키요오미에게 전해진다. 내 입으로 직접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 말하는 것은 생각보다 더욱 비참한 일이다. 최대한 덤덤하게 말했지만 점점 매여오는 목소리에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 울거나 목이 매여있는 걸 들키면 그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쿠사 키요오미여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 헛기침을 하고 이제 밥 먹으러 가자며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 손에 차키가 들려있던 걸 보니 차를 끌고 온 것 같던데, 이쪽으로 나온 거면 이 근처에 세운 듯 싶었다. 그렇다면 검은색 벤츠를 찾으면 될 거고, 나는 문이 열리자마자 바로 조수석에 앉은 뒤 창문 쪽을 보면 된다. 그렇게 되면 키요오미가 알아채기 전에 빨갛던 눈가와 코가 진정되지 않을까?


 

“왜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데?”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발걸음만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 얘가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뭐라고?”

 

“왜 내가 널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냐고.”

 

“⋯당연한 걸 물어보네. 보통 사람들은 좋아하는 사람이 자기랑 엮이는 걸 싫어한다면 그렇게 생각하거든?”

 

“그게 무슨 소리야? 너 나 좋아해?”


 

이런 미친.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기도 전에 전에 욕을 중얼거리며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머릿속이 새하얘진다는 게 이런 기분인 건가⋯. 무려 1년도 아니고, 2년도 아닌 10년 동안이나 잘 숨겨왔는데⋯⋯. 겨우 이런 말 때문에 들켜버린 내 자신이 통탄스럽다. 게다가 난 고백할 생각도 없었는데!


 

“아니⋯⋯ 아니야. 실언한 거니까 그냥 잊어.”

 

“이미 들은 걸 어떻게 잊어?”


 

키요오미는 방금 내가 내뱉은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말하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다. 혹시 나를 곤란스럽게 하려고 그러는 거면 이미 완벽하게 곤란한 상황이니까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하고 싶을 정도다.


 

“나나 너나 서로 불편한 일은 만들지 말자는 거야. 그리고 나 이제 너 안 좋아⋯”

 

“이젠 안 좋아한다고?”


 

에이씨. 사람이 말하고 있는데 왜 끊고 난리야? 순간 짜증이 치밀어 숙이고 있던 고개를 팍 들어 키요오미를 올려다보았다. 아까부터 질문만 해대는 신입사원처럼 계속 물어보는 것도 짜증이 나던 참이었다.

 

막상 얼굴을 보니 방금 전까지 얼굴에 차올랐던 열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없는 상태였다. 역시 다른 건 다 몰라도 얼굴 하나는 끝내주게 잘생긴 탓이었다. 얼굴만 보면 화가 풀리는 나도 정상적이지는 않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려고 했는데 키요오미의 상태가 좀 이상했다. 어딘가 좀 슬퍼 보이는 것 같은⋯.


 

“너 어디 아파? 갑자기 왜 그래?”

 

“⋯⋯이젠 나 안 좋아해?”

 

“뭐?”


 

갑자기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싶어서 눈썹사이를 찌푸렸다. 아까부터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만 해대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젠 나 안 좋아하냐고.”

 

“⋯그게 왜 궁금한데?”


 

그야⋯⋯. 말하기가 좀 그런 건지 말끝을 흐리며 입술을 달싹이는 키요오미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을 빡치게 하는 데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첫 번째는 말을 하다가 마는 것이고⋯⋯.


 

“내가 널 좋아하니까.”


 

엥?

 

귓가에 들려오는 나직한 음성에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설마 지금 나를 놀리는 건가. 몰래카메라 같은 건가? 머릿속이 파도가 치는 것처럼 어지럽다.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을 뻐끔거렸지만 생각했던 말이 나올 일은 없었다.


 

“⋯좋아한 지는 꽤 됐어. 그냥, 친구로 남으려고 지금까지 티를 안 냈던 건데⋯⋯. 후회할 것 같아서 최근에서야 티 냈던 거야.”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람. 두 눈을 크게 뜬 채로 얼굴만 바라보니 이내 고개를 돌린 키요오미가 낯선 표정을 짓는다. 이렇게 어두운 밤인데도 새빨갛게 물든 귓바퀴가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그 얼굴을 가만히 보자니 내 얼굴까지 덩달아 빨개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네가, 어, 나를⋯⋯.”

 

“⋯⋯.”

 

“좋아한다고?”


 

방금 전까지 꾹 다물려있던 입이 천천히 벌어진다.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고 가만히 있다 내뱉은 말은 “응.” 따위의 짤막한 긍정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일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지 잘 모르겠다. 누구라도 10년을 짝사랑했던 상대가 갑자기 날 좋아한다고 하면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었다. 현재 내 기분은 마냥 좋은 것보단 당황스러움이 차지하는 비율이 더 컸으니까.

 

거짓말인가 싶어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지만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을 인지하니 심장은 빠르게 뛰고, 더 이상 빨개질 리가 없는 얼굴이 더 달아오르는 기분이다.

 

이상하다. 분명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이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정말 친구로만 남겠다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는데⋯⋯. 나를 좋아한다는 말 한 마디를 들었다고 이렇게까지 심장이 뛸 일인지 모르겠다.


 

나는 키요오미의 얼굴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두 손으로 덮으며 중얼거렸다.


 

아.

 

역시,

 

사랑은 너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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