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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칫국은 금물

 

w. H(@hqpoop)

 

 

 

‘와아-!’


  덥다고 말하기엔 조금은 춥고, 춥다고 말하기엔 조금 더웠던 늦가을. 운동장에서 뛰는 아이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열심히 뛰고 있었다. 아이들의 열정을 보고 있자 하니, 괜히 나까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턱을 괴고 창문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누군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흩날리는 회색 머리만큼은 눈에 딱 들어왔다. 예쁘게 웃으며 땀을 닦고 있는 스가와라 코우시.

  스가와라와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옆집에 살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놀이터에서 한 번 만났던 게 인연이 되어, 두 번, 세 번 만나게 되며 계속 친하게 지내게 됐었다. 얼마나 친하게 지냈냐면 부모님들까지 우리 때문에 친해질 정도였으니 말은 다했다. 어릴 때는 같이 왈가닥 초등학생이었으면서 중학생, 고등학생, 세월이 갈수록 혼자 철이 들었다. 옛날에는 단 한 번도 이런 감정이 느낀 적이 없었는데, 언제부턴가 스가와라의 철이 든 모습에 나는 스가와라를 좋아한다는 걸 자각했다.

  스가와라 코우시의 학교생활로 말할 것 같으면 3학년 배구부원이자 세터. 그리고 비운의... 3학년 비주전. 작년까지는 날지 못하는 까마귀 소리나 듣는 팀의 세터로 있었지만, 천재 세터 카게야마 토비오가 입학한 지금은 비주전으로 밀려났다. 합숙을 끝내고 며칠이 지났던 날, 스가와라가 내 손을 잡고 울던 날이 생각이 났다.

  아, 그날은 생각 안 하고 싶었는데.

 

_

 

“삼 학년 하기 싫다~”

“그래도 해야지. 배구부 훈련 어때? 곧 합숙 아닌가.”

“재미있어! 너는 맨날 귀가부 재미있어?”

“너 또 나 독서부 빡쳐서 그만둔 걸로 놀리지.”


  나를 놀리는 스가와라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때렸다. 스가와라는 그렇게 아프지도 않으면서 괜히 아픈 척을 하며 맞은 팔을 문지르고 있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허, 하고 웃고 먼저 걸어갔다. 미안해~ 네가 귀가부 말고 배구부 매니저 했으면 좋겠어서 그래. 괜히 잘생겨서는 웃는 모습으로만 사람 떨리게 하는데 뭐 있어. 진짜 확 배구부 매니저 신청해 버리고 싶게.


“그렇게 먼저 갈 거야?”

“어, 갈 거야. 갈 거야!! 빨리 너도 체육관 가.”


  체육관 쪽으로 스가와라의 등을 떠밀었다. 스가와라의 원래 힘이라면 절대 밀리지 않았을 거면서 또 나한테 져주었다. 스가와라를 문 안으로 집어넣고 체육관을 뒤로 한 채 다시 건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스가와라는 뒤에서 나를 크게 불렀다. 학교 안으로 들어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괜히 투덜거리며 다시 체육관 앞으로 갔다. 스가와라는 가방 안에서 담요를 꺼내어 손에 쥐여주었다.


“에어컨 춥다며! 갖고 가.”

“야아, 너는....”

“됐어~ 추위는 네가 더 타면서. 빨리 교실 가! 지각한다.”


  담요를 품에 꼬옥 안은 채로 다시 학교 건물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품 안에 있는 담요에서 스가와라의 섬유유연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괜히 기분이 좋아서 웃음이 실실 나왔다. 내가 추위를 잘 타는 걸 알고 이렇게 챙겨 줬다는 사실이 나를 설레게 했다.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이런 다정함은 범죄라고 했는데. 내가 계속 실실 웃어서 그런지 막 등교하던 내 친구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너 어디 머리 맞고 오는 길이니?”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친구한테 소리를 지르고선 담요를 안은 채 반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스가와라가 준 담요를 두르려고 펼치는 순간, 쪽지가 툭 하곤 바닥에 떨어졌다. 담요 안에 있던 쪽지인 것 같았다. 바닥에 떨어진 쪽지를 주워서 펼쳐보았다. 익숙한 필체는 스가와라의 것이었다.


스가와라 코우시 [오랜만에 같이 집 가자!] 오후 12:21


  최근 훈련이 바빴던 스가와라는 함께 하교를 하지 못했던 게 아쉬웠나 보다. 하긴 어릴 때부터 고등학생 2학년 때까지 등하교를 항상 같이 했는데, 최근 들어서는 합숙이니 전국대회니 하면서 하교는 커녕 등교 때 빼고 얼굴 보는 것도 힘들었으니. 합숙 끝나고 조금 쉴 시간 있으니까 같이 하교나 하는 건가. 어찌 됐든 스가와라랑 같이 집에 갈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담요를 끌어안았다.

 


* * *

 

  목이 빠져라 하교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마지막 시간,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자마자 총알처럼 교실에서 튀었다. 스가와라가 준 담요는 종일 유용하게 쓰다가 깔끔하게 접어서 가방 안에 넣어두었다. 빨아서 준다고 해야지! 또 플러팅이나 칠 생각에 신나서 스가와라네 반 앞으로 갔다. 스가와라는 항상 장난으로 나의 플러팅을 받아주었는데, 나를 좋아서 받아주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익숙해서? 나는 항상 진심이었는데. 손가락을 꾹꾹 누르며 스가와라네 반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우리 반 원래 일찍 마치잖아.”


  시답잖은 얘기나 하면서 교문을 나섰다. 항상 일상처럼 느껴졌던 시간이 이제는 일상이 아니었기에 소중하게 느껴졌다. 작은 시간이라도 대화를 조금이라도 더 하기 위해서 발걸음을 늦추었다. 스가와라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나의 발걸음을 맞춰주는 게 느껴졌다. 스가와라도 나와 있는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질까.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다.


“오늘따라 집 가기 싫다. 놀이터 갔다 갈래?”

“거기 지금 애기들 없으려나?”

“응, 있어도 코우시가 놀아줄 거 아니야?”


  초등학생 때부터 항상 가던 놀이터로 향했다. 늦저녁이라 그런지 놀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긴 이 시간이면 애들은 다 집 갈 시간이지. 놀이터로 들어가자마자 그네에 앉았다. 그네가 두 개가 있었기에 어릴 때부터 항상 스가와라와 함께 나란히 앉아서 그네를 타곤 했었다. 스가와라와 놀이터에 온 건 오랜만이라 그런지 괜히 쑥스럽게 느껴졌다. 솔직히 나이 먹고 이렇게 둘이서 있는 건 썸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아닌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있었다.

  둘이 나란히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위기만 봐도 스가와라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불안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내가 좋아한다는 걸 안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뉘앙스가 많았는데, 설마 눈치를 챈 건가? 친구 그만하자고 하면 어떡하지. 괜히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오더니 내 발목을 콱 잡는 것 같았다. 앞뒤로 움직이던 그네가 멈추었다. 뒤따라 스가와라의 그네도 멈추었다. 놀이터에는 정적만 흐르고 있었다. 아, 차이기 전에 고백이라도 할까. 아, 그냥 하자. 심장이 쾅쾅 뛰는 것 같았다. 지금, 지금....


“좋아해, 안 받아 줘도 돼! 그냥 꼭 얘기하고 싶...”

“나, 팀을 위해 주전을 포기했... 뭐?”


  아, 망했다.


  동시에 다른 말을 꺼낸 우리는, 아까보다 더욱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할 것 같았는데 목에 무언가가 막고 있는 듯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은 틀어막힌 채 아무 말도 하지 못 하는 건 스가와라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내 고백보다 스가와라 주전 얘기가 더 중요한 것 같은데. 이에 대해 얘기를 꺼내고 싶은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입을 겨우 열었다.


“코우시, 괜찮아?”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어. 팀을 위한 거니까!”

“너, 야....”


  스가와라가 괜찮다는데 내가 할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 주고 싶은데, 과연 그게 스가와라한테 위로가 될까. 고민이 컸다. 결국 주절주절 아무 얘기나 늘어놓았다. 이렇게 말해서 내 고백을 잊게 하고, 일석이조로 위로까지 하고 싶은데. 스가와라의 눈은 차마 마주치지 못 하고 먼 산을 보며 얘기하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대답을 계속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대답이 없어졌다. 내 말만 하느라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 눈치를 채자마자 옆을 돌아봤을 때, 스가와라는 입술을 꽉 깨물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코우시, 코시?! 왜 울어...! 야아....”

“... 나 같은 사람 좋아하게 해서 미안해.”

“야, 그런 말 하지 마! 그런 말 하지 마. 야아!”


  스가와라는 주전 때문인지 나의 얘기 때문인지 끝도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자기 같은 걸 좋아하게 미안하단 말이 머리를 아프게 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제일 빛나는 사람이, 졸업 전 마지막 주전을 포기하기까지 얼마나 큰 다짐이 필요했으면 그랬겠어. 나는 내가 고백한 사실도 까먹고 그냥 스가와라를 안아버렸다. 울지 마, 울지 마....


“내 고백 그냥 잊어. 그냥 네가 편안할 때 다시 얘기하자. 나 편하자고 잊으라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

“유치원생 때 이후로 이렇게 우는 건 또 처음 보네. 얼마나 서러웠던 거야.”


  나의 고백은 한동안 묻어두기로 다짐했다. 힘든 애한테 굳이 나라는 짐을 더 올려주긴 싫었다. 나 같은 걸 좋아하냐는 말까지 나올 정도면 얼마나 심란한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스가와라한테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지만 잠정적으로 차인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 내가 참아야지. 내 마음만 강요하면 그게 되냐....

 


  그렇게 나의 짝사랑은 흐지부지하게 끝나고 말았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 전국 대회니 뭐니 하며 바빴으니.

 

 

_

 

 


  운동장에서 남의 속마음도 모르고 뛰고 있는 스가와라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아, 나의 짝사랑이여.

  너의 빛나는 모습만 봐도 좋으니, 내가 너의 곁에 안 있너도 좋으니, 그 웃음만은 항상 한결같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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