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제 사랑은 지구력이 있었던 거예요"
그 여름, 하늘을 초록이 다 덮으면 숲이 되곤 했던 거리에서 카게야마 토비오가 말했다. 누구보다 확신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서. 온 세상의 색채가 그 눈동자에 담겨 있었고 나는 평생 그런 얼굴을 본 기억이 없었다. 아득하게 옅어지는 여름날의 빛 속에서 계절의 끝을 체감하면서도 손끝에 닿는 온기에 다가오는 모든 날이 두렵지 않았다. 사라질수록 선명해지는 것들이 있다고, 부유물을 걷어내자 거기에 맑은 마음이 스며들었다. 사랑은 늘 공과 같이 예고도 없이 날아들었다가 다시 던져졌다. 어디에도 투수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라는 이름의 글러브를 단단히 조였다.
이번에는 내가 던질 차례였다.
캐치볼
w. 항해(@_sail_sea)
키타이치 중학교 재학시절, 배구부의 오이카와 토오루는 나를 잠 못 들게 만드는 주범 중 하나였다. 다시 말하자면 사춘기 시절 나에게 있어서 오묘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그런 유일무이한 남자애였다. 나는 어렸지만, 어떤 사실은 너무 명확하게 깨달아버렸기에 그에게 고백한다고 하더라도 이어질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여타의 여학생들처럼 먼 곳에서 첫사랑과 동시에 짝사랑 상대인 오이카와 토오루를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자기 길을 멋지게 닦아나가는 그 애를 보고 그 애가 발하는 빛에 손을 뻗으면 나는 그저 녹아 없어져 버릴 것만 같아서. 무지를 원했지만 너무나 많은 것을 알아버린 나는 겁쟁이였고, 변명이라고 비겁하다고 손가락질할지 몰라도 그때의 나는 욕심을 내는 방법을 몰랐다.
그 시절 그 애는 다정한 말투와 특유의 맑은 웃음으로 여학생들의 마음속을 헤집어놓기를 잘했다. 본인도 그걸 잘 알았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 관계의 선을 명확하게 그어버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알았다.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먼지 한 톨보다. 하루 지나면 까무룩 잊혀질 얼굴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빛을 쫓는 방법뿐이었다. 힘껏 달음박질치고 넘어지고 다시 무릎을 털고 일어나면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해 겨울, 오이카와가 아오바죠사이에 지원서를 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고 나는 거기 내 짧은 인생을 걸었다. 그렇게 덜컥 오이카와와 함께 아오바죠사이에 합격했다. 오이카와 토오루와 그 하나만을 공유한다는 사실도 나에게는 벅찼다. 여름날의 나는 다이어리 한구석에 비밀스럽게 그의 이름을 적어넣고 그 애의 곁에서 발맞춰 걸으며 손을 잡는 상상을 줄곧 하곤 했다.
아오바죠사이에서도 여전히 오이카와 토오루는 닿을 수 없는 별처럼 느껴졌다. 배구에 관해서 관심도 없으면서 없는 용기를 쥐어짜내어 배구부 매니저로 지원했고 그해 지원자 수가 적어 기적처럼 붙을 수 있었다. 배구 외에는 별 관심이 없는 오이카와 토오루는 나에게 딱히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저 가까이서 오이카와 토오루의 얼굴을 볼 수 있음에 기뻤고 남몰래 전속력으로 뜀박질하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나와 오이카와 토오루가 처음 말을 섞은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일방적인 오이카와의 인사였다. 나는 언제나처럼 체육관 뒷정리를 하는 중이었고 막 탈의실에서 나온 오이카와가 "오늘도 고마워 (-)쨩" 하고 가볍게 인사를 해왔다. 그 인사 하나에도 심장은 주제도 모르고 날뛰었고 오이카와 토오루가 사라지고 난 이후까지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오이카와가 내 이름을 불러줬다는 사실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짝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으레 할 법한 '혹시'와 '만약에'로 시작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래, 사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오이카와는 내 옆에 있는 매니저 선배에게도 똑같이 인사했다.
우리는 교집합이 없었다. 대화는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았다. 홀로 더 태우지도 멈추지도 못할 짝사랑을 아슬아슬하게 이어나갈 뿐이었다. 그렇게 바라만 보다가 여러 계절이 흘렀다. 오이카와 토오루와 가까이 지내게 되면서 욕심은 더 커져만 갔다. 그 애가 다른 애를 보고 웃어주기만 해도 뭣도 아니면서 가슴이 욱신거렸다. 내가 뭔데, 그럴 자격도 없으면서 오이카와와 함께할 때면 속이 좁은 사람이 됐다.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기가 더 어려워졌다. 그렇게 폭탄 같은 마음을 안고 살기를 몇 달, 겨울 합숙에서 오이카와 토오루를 향한 마음이 예고없이 터져 나왔다. 그 애는 분명 내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걸 처음부터 알았을 것이다. 비참하다고 생각할수록 더 비참해져 그만 생각을 멈췄다.
이미 술을 몇 잔 걸친 후였다. 합숙 마지막 날이었고 숙박은 남녀 따로가 원칙이라지만 마지막 밤이라는 사실에 그런 것쯤이야 쉽게 무시한 우리는 저마다 가져온 것들을 자랑스레 꺼내 보였고, 그렇게 한바탕 술판이 벌어졌다. 별다른 건 아니었고 오이카와가 나 대신 흑기사를 자처할 때 동시에 내 마음의 방아쇠가 당겨졌을 뿐이었다. 터지고 난 이후는 주워 담을 수 없었다. 마음과 말이 그랬다.
사건의 시작과 끝은 명료했다. 취기가 올라 차가운 술잔에 손을 식혀 달아오른 뺨에 연신 문질러 가라앉히고 있었다. 마츠카와와 하나마키가 완전히 주도권을 잡아버린 술 게임에서 이와이즈미는 뻗은 지 오래였고 오이카와 토오루도 온몸에 한껏 분홍빛을 머금은 채 평소보다 약간 흐트러진 채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서 나도 빙글빙글 도는 정신을 겨우 붙잡고 있었고, 남은 건 우리 넷뿐인 게임에서 내가 걸렸다. 하나마키가 텅 빈 술병을 흔들다가 마지막 남은 병을 까기 시작했고, 마츠카와가 아직 내 잔에 술이 남았다며 그대로 쭉 들이키라고 했을 때 오이카와가 내 손에 쥐어진 잔을 자연스럽게 빼앗아갔다.
"더 마시면 안 돼"
"내일 못 일어나면 어떡해 (-)쨩"
깔끔하게 한 번에 내 잔에 담긴 술을 들이킨 오이카와가 입술을 소매로 닦고 말했다. 귓가에 목소리가 번져서 들렸고 나는 무슨 정신에서였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오이카와에게 다가가서 그 어깨를 붙잡아 일으켰다. 몸이 휘청거렸고 오이카와의 품에 안기는 자세가 되자 나는 창피해져서 그만 또 오이카와를 밀어냈다. 술병이 엎어지고 바닥이 흥건히 젖어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난장판이었다. 하나마키와 마츠카와가 정신없이 정리하는 동안 오이카와의 옷자락을 우악스럽게 당겨 계단 아래까지 겨우 내려갔다. 걸음마다 철제 계단의 텅텅거리는 소리가 복도에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새벽 특유의 선득한 향이 코끝을 스쳤고 하늘에는 쏟아질 듯이 많은 별이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묻어 있었다.
오이카와는 춥겠다며 자기 저지를 벗어 내 어깨에 둘러주고는 이제 그만 들어가자고 무릎을 굽히고 눈을 맞춰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추운지 코끝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망설임으로 아무 말도 못 하고 바닥만 보고 있다가 겨우 고개를 들고 오이카와를 마주 봤다. 말을 꺼내기 전인데, 무슨 말을 할지 전부 안다는 표정으로 오이카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말을, 말을 해야겠어.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갗을 푹 파고들어 상처를 남겼다.
몸에서 오이카와의 향이 났다. 오늘 밤이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싶다가도 꿈이기를 바랐다. 입에서 뿌옇게 알코올 냄새가 풍기는 게 싫었다. 내가 오이카와에게 하는 고백은 이래서는 안 됐는데 그만 봇물 터
지듯 불어버렸다. 창피해서 차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너를 좋아했어"
"너를 쭉 좋아했어, 키타이치에서부터"
나랑 사귀어 달라는 건 아니야. 내가 너를 좋아했다고,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뿐이야. 오이카와가 한참 침묵하다 마른침을 삼키고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 좋아하지 마 (-)쨩"
분명 다정한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고 그래서 더 속이 문드러지는 것만 같았다. 고개를 들어 오이카와를 볼 수가 없었다. 술에 취하자 평소에 하지 않던 말들도 길을 잃고 툭툭 튀어나왔다.
"그게 쉽게 되냐고"
자존심은 버린 지 오래였다. 끝까지 평정심을 잃지 않은 채 다정한 모습을 보자 오이카와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그 입으로, 그 목소리로 확인사살을 당하자 낙뢰를 맞은 기분이었다.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새벽바람이 차다는 사실이 그제야 느껴졌다. 오이카와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저지를 여며주었다.
"미안해 (-)쨩"
"(-)쨩이 원하는 사랑, 나는 못 해줘"
사랑이 떼를 써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한참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오이카와가 바람을 막고 섰다. 이런 모습 때문이었다. 이런 하나하나 입에 올리면 끝이 없을 다정함 때문에 내가 오이카와를 좋아했었지. 처음에는 겉모습에 반해 시작한 사랑이었지만 점점 그게 아니게 되었지. 차라리 얼굴만 잘난 사람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너한테 마음을 걸지 않았을 텐데.
정적을 깨고 계단 위에서 마츠카와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흐느적거리는 몸을 이끌고 계단 난간을 부여잡으며 겨우 방으로 다시 들어가려 하자 오이카와가 나를 부축했다. 이게 내가 그에게 받는 마지막 호의일 거라고 속을 다잡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기란 쉽지 않았다. 술에 취해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핑계를 대고 살갑게 말을 걸어오는 오이카와 토오루를 피했다. 피하는 건 쉬웠다. 어차피 맨정신으로도 좋은 소리를 못 들을 건 뻔했다. 두 번 죽는다면 모를까. 그 눈빛을 견디기가 버거워 체육관에서도 오이카와와 둘이 남는 자리를 마다했다. 좋아해서 더 같이 있고 싶은 마음과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공존했다. 함께 있으면 욕심을 내버렸고 마음이 접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오이카와 토오루를 볼 때마다 내 마음은 빛바랜 창문이 되었고 외의 다른 건 모두 흐리게 보였다.
그 사건 이후로 방학은 빠르게 찾아왔고 나는 도망치듯 그사이에 숨어버렸다. 오이카와가 몇 번 더 연락해오는 일도 있었지만 내가 피하자 그마저도 잦아들었다. 노트에 적힌 오이카와의 이름을 펜으로 그어 덮어버렸고 그 아이와 관련된 모든 것에서 멀어지고자 했다. 오이카와 토오루를 안 지 4년, 혼자 하는 사랑의 종지부를 찍었다. 점은 결국 선이 되지 못했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고 운명의 장난인지 저번만 해도 그렇게 바라 마지않았던 오이카와와 같은 반이 됐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욱신거렸고,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이카와는 나를 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 이제 그 미소가 더는 그립지 않았고 오히려 약간 미운 마음이 들었다. 오이카와 토오루가 다정해서 미웠다. 나는 이렇게 괜찮지 않은데, 혼자 괜찮아 보여서 그게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사랑은 이상하다. 특히 이 시기의 사랑은 유독 이상하다. 벚꽃이 져버려도 마음은 영원할 것 같았는데 한순간에 식어버리고 만다. 사랑의 농도와는 철저하게 관계없이. 그렇게 그해 봄, 벚꽃잎으로 어질러진 교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오이카와를 향한 마음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2학년을 맞이하고 아오바죠사이 배구부의 첫 경기 상대는 카라스노 고등학교였다. 명부를 받아서 선수명단을 훑어보다 익숙한 이름을 찾아냈다. 시라토리자와에 갈 줄 알았는데, 카라스노에 갔구나. 카게야마 토비오라고 선명하게 인쇄된 부분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빳빳한 종이에 지문이 어스름하게 남았다. 종이를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뽀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체육관에서 운동화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와 겹쳐서 들렸다. 문득 그 애가 오이카와 토오루의 뒤를 쫓아다녔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선배, 좋아해요"
키타이치 졸업을 목전에 둔 시기에 소각장 앞에서 한 남학생에게 고백을 받았던 적이 있다. 오이카와 토오루를 보려고 가끔 가곤 했던 체육관에서 늘 오이카와 뒤를 졸졸 따라다니곤 했던 애. 나한테 그 아이의 존재는 딱 그 정도였다. 그 애의 이름이.. 그러니까 카게야마.. 카게야마 토비오였다. 나를 어떻게 알았는지. 오이카와를 따라다닌다는 점에서 자신과 나를 같다고 생각해 친밀감을 느꼈는지. 사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다.
그때의 난 도서부였고 책을 빌리러 오는 것도 아니면서 매일같이 도서관 앞을 갸웃거리는 카게야마를 꽤 빈번하게 마주쳤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책을 정리하고 문을 닫고 나오는 중이었고, 나를 기다린듯한 그 애가 나한테 꺼낸 말이 의외임과 동시에 너무나 그 애가 할법한 말이라 할 말을 잃었던 기억이 난다.
"오이카와 선배 멋있죠?"
고개를 끄덕이자 카게야마 토비오는 내가 알지도 못하는 배구를 성심성의껏 설명했고 오이카와가 선보이는 기술에 대해 굉장하다는 듯 연신 감탄을 하며 말을 이어갔다. 이야기하는 그 애의 눈빛은 맑았고, 그 눈을 보며 카게야마가 발하는 빛도 오이카와가 뿜어내는 빛과 동류의 것임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아이가 내게 한 고백은 신선한 충격으로 남아 있었다. 물론, 오이카와를 좋아해서 아오바죠사이를 따라갈 정도였던 나에게 카게야마 토비오의 마음을 받아줄 공간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고백 앞에서 아무 대답을 줄 수가 없었다. 나의 고백을 받은 오이카와 토오루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짝사랑에서는 대개 투수는 존재했으나 포수가 존재하지 않음이 문제가 되었다. 여전히 나의 용기의 무게와 타인의 용기의 무게는 쉽게 다르게 치부된다. 우리의 고백은 가끔 타인에게 이기적인 단상으로 남고 동시에 스스로에게는 면죄부가 되었다.
그 고백 이후로는 처음으로 만나는 거였지. 긴장으로 괜히 입안이 바싹바싹 말라 갔다. 경기복을 갖춰 입고 나온 배구부를 뒤로한 채 체육관을 훑어보다 어느 한 점에서 시선이 딱 멈췄다. 분명 중학생 때만 하더라도 키가 비슷했던 것 같은데, 카게야마 토비오는 어느새 내 위로 머리 두 개 높이만큼 키가 커져 있었다. 그 일이 있었던 날로부터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사춘기의 성장 속도를 고려하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카라스노 고등학교의 독특한 플레이 방식으로 경기는 평소보다 과열되어 있었고 나는 그날 처음으로 오이카와가 아닌 다른 사람을 줄곧 쳐다보고 있었다. 눈에 밟혀서, 호기심에, 그냥.. 이런 갖은 이유를 붙여가며 카게야마 토비오를 눈에 담았다. 그 애는 키타이치에서 오이카와를 보러 갔었던 경기에서 봤던 모습으로부터 아주 멀리 와 있었다. 숨을 죽이며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부정으로 시작한 마음은 소리소문없이 정착하고, 괜히 카게야마 토비오가 아직도 나를 좋아하는 건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이어 했다. 카게야마는 간간이 이쪽으로 눈길을 던졌고 그럴 때마다 카게야마를 보지 않은 척하려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는 시간과 함께 숨 막히는 랠리가 끝이 나고 경기는 카라스노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안녕하세요 (-)상"
수건과 음료를 건네주고 마지막으로 뒷정리를 하려고 자리를 옮기자 코트 중앙에 있던 카게야마 토비오가 어느 틈에 걸어와 내 앞에 섰다. 아이 같은 구석이 있었던 얼굴은 멀끔하게 자라 앳된 티를 벗었지만 애꿎게 달아오른 목에 손을 가져다 대는 버릇은 여전했다.
"오랜만이야"
"경기 이긴 거 축하해"
"감사합니다"
"아오바죠사이에 갔다는 소식은.. 들어서 알고 있었어요“
가벼운 안부를 주고받고 눈인사를 하고 돌아가려고 하는 나를 카게야마가 불러세웠다. 입술을 꽉 물고 바닥만 바라보던 눈이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나를 올곧게 응시했다. 멀리서 버스에 시동이 걸렸는지 한바탕 웅웅거렸고 카게야마 토비오를 부르는 카라스노 고등학교 배구부의 목소리도 함께 체육관을 울렸다. 저기, (-)선배. 하고 부르는 소리에 카게야마를 돌아보자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작게 구긴 카게야마가 말을 이었다.
“아직도 오이카와상 좋아해요?”
바깥은 이미 해가 완전히 기울어져 어스름한 저녁 빛이 창문으로 몸을 밀어 넣고 있었고 동시에 체육관 천장에서 조명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하나씩 불을 뿜어냈다. 선배는 나에게 얼른 정리하고 오라며 소리쳤고 카게야마는 여전히 내 앞에 서 있었다. 너는 그럼, 너는 여전히 날 좋아해?
"아니“
그게 언제 일인데 그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웃으며 말하자 카게야마의 곧게 뻗은 눈썹이 더 안쪽으로 기울었다. 그래요?
"저는 아직 (-)선배 좋아해요“
"예전보다 더 좋아해요, 비교도 못 할 만큼“
이 말 하고 싶어서 왔어요. 아오바죠사이에 (-)선배가 있다고 해서, 더 열심히 연습했어요. 기억나요? 도서실 앞에서 처음으로 이야기했던 거. 저 이제 그때 말한 기술 전부 제대로 익혔어요. 가장 먼저 (-)선배한테 보여주고 싶었어요. 선배가 봤으면 했어요. 제대로 얼굴 보고 아직도 선배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
었어요.
"대답 들으려고 하는 말 아니에요“
다음에 선배 보러 와도 돼요? 멍하니 카게야마가 하는 말을 듣고만 있다가 겨우 정신을 붙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 끄덕임에 카게야마가 사람이 저렇게 웃을 수도 있나 싶을 정도로 입꼬리를 예쁘게 휘고서는 몸을 돌려 서둘러 체육관을 빠져나갔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가슴께에 손을 얹자 맥박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었다. 미쳤어. 미쳤어. 미쳤다고. 정신 차리자고 뺨을 두어 번 때리자 더 혼란이 가중됐다. 일단은 집에 가서 생각해보자. 이게 무슨 일인지.
책상에 늘어지게 앉아 다이어리에 카게야마 토비오의 이름을 끄적거렸다. 거짓말 같은 하루였다. 말도 안 돼. 더 말도 안 되는 점은 그 말을 듣고 심장이 쿵쾅거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조도 없이 마음이 기운다고? 정확하게 말해서 4년이라는 시간을 앓았으니 지조가 없는 건 아니지만. 괜히 숨이 턱턱 막혀왔다. 창문을 열고 앉아있다가 다시 몸을 일으켜 좁은 방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
내게 있어서 사랑은 언제나 캐치볼이었고 이번에 내 역할은 공을 받은 포수였다.
그 일 이후로 카게야마 토비오는 간간이 하교 시간에 맞춰 나를 보러 왔다. 자전거를 타고 와서는 집 앞까지 나를 데려다줬다. 처음에는 와이셔츠 끄트머리를 살짝 쥐고 탔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과감해져 이제는 카게야마의 허리춤을 얼추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나 왜 데리러 와? 물을 필요도 없이 보고 싶어서요. 좋으니까요. 선배가 좋으니까요. 콧노래라곤 불 줄도 모르는 것 같았던 애가 선선하게 부는 바람에 맞추어 흥얼거리며 대답해왔다. 왜 내가 좋은데? 그냥요. 선배는 그럼 오이카와상 왜 좋아했는데요? 카게야마는 다른 건 다 좋았지만 가끔은 눈치가 좀 없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자전거에서 내리면 꼭 붙잡았던 와이셔츠 허리춤이 구깃구깃해져 있었는데 그걸 펴주려 손을 뻗어도 카게야마는 늘 마다했다. 들어가요. 늦었어요. 부모님 걱정하시면 어떡해요. 그럼 너는? 제 걱정은 선배 몫이 아니에요. 내일도 데리러 가도 돼요? 사랑에 있어서 나와 다른 모습이 신기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다정함이 그랬다. 겪어보지 못했던, 이제까지와는 결이 다른 다정함이었다. 올곧고 성실한 것. 그게 그 아이의 던지는 방식이었고 나는 그게 좋았다.
"너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게 아니면 왜 이렇게 나한테 잘해줘?“
자전거를 세우고 앞에 멀뚱멀뚱 서 있는 카게야마의 손을 처음으로 잡았다. 카게야마가 눈에 띄게 움찔 떨더니 손을 빼지 않고 내 손가락 사이에 자기 손가락을 겹쳐왔다. 간질거리는 기분이 손끝에서부터 피어올랐다. 바라본 목덜미가 붉었다.
"대답을 안 기다리는 게 아니에요“
"그냥 계속 좋아하는 거예요“
"그게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전부니까“
카게야마 토비오는 고백을 할 때면 꼭 눈을 맞춰오는 버릇이 있었다. 그 신실한 눈동자에 닿으면 벗어날 틈도 주지 않고 속절없이 마음이 울렁거렸다. 있잖아, 너랑 있어도 나는 좋은 것 같아. 잡힌 손에 힘을 주었다. 카게야마 못지않게 붉어져 있을 뺨을 생각하면서 앙 다물려있던 입술을 천천히 떼어냈다.
"나도 너를.."
"너를 좋아해"
"지금은 너에 비해서 한없이 작은 마음일지도 몰라. 이걸 좋아한다고 표현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
"너랑 더 있고 싶다면, 그런 욕심이 난다면... 너를 좋아한다고 말해도 되는 거겠지?"
말없이 카게야마가 토비오가 활짝 웃어 보였다. 그 어떤 미사여구를 붙인다 하더라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 그 미소 하나에 깃들어 있었다. 그를 보자 덩달아 입꼬리가 올라갔다.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토록 노골적인 애정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내가 시선을 자꾸만 피하자 카게야마가 눈으로 하염없이 나를 쫓아왔다. 거리에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잎이 나부껴 진녹색의 그림자를 자아냈고 우리는 그 안에 있었다. 헤어지기 싫어 붙잡고 있던 손을 겨우 떼어내자 카게야마가 다시 손끝을 가볍게 쥐며 말했다. 내일 마치고 교문 앞에서 기다릴게요. 조심해서 들어가요.
아쉽다는 듯이 손가락을 스치는 감각에 우물쭈물하다 결국 궁금했던 것을 입 밖으로 냈다. 토비오, 어떻게 날 그렇게 좋아할 수 있었던 거야? 내 물음에 카게야마가 망설임 없이 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 다른 어떤 대답도 그보다 그를 더 잘 표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