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몽 (白日夢)
w. 할리(@Harleyball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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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익-
"... 떡해“
"신고해야 되는...“
"...로, 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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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밝은 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여름날. 가쁜 숨을 내쉬던 내가 눈을 뜬 곳은 다름 아닌 교실 안이었다.
'꿈이었나.‘
평범한 책상, 아이들, 떠드는 소리까지. 영락없는 평범한 교실의 쉬는 시간이었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아까부터 당황한 표정으로 계속 나를 바라보던 친구 정도.
"너... 갑자기 왜 우냐?“
"무슨 소리...“
뜬금없는 친구의 말을 대답하기 위해 낸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고 고개를 돌려 본 거울에 비치는 나의 얼굴은 눈물에 젖어있었다.
"악몽이라도 꿨어?"
"... 기억 안 나."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나왔냐?"
"없는데."
"아니까 하는 말이야.“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슨 꿈이었길래 이렇게 서럽게 울었던 걸까. 너무 충격적인 꿈은 뇌에서 기억을 지운다는 이야기는 들어봤는데, 겪어본 건 처음이었다. 그나저나 목소리는 왜 이렇게 변한 건지. 에어컨 바람 때문일까.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데.‘
그저 그렇게만 생각했었다.
*
"(-), 체육관 갈 거야?"
"아니, 오늘은 좀 잘래.“
점심시간, 밥을 먹고 난 뒤면 항상 친구랑 체육관을 향했다. 배구 경기를 보는 게 즐거웠으니까. 그런데 날이 아닌가. 조금 많이 피곤했다. 업어서라도 데려가 주겠다는 친구를 등 떠밀어 보낸 뒤 책상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 답답해.‘
얼마 못 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있다가는 먹은 점심까지 올라올 기세였다. 그대로 체육관 쪽으로 발을 옮겼다.
'아, 사람 많은 건 싫은데.‘
체육관을 향해 내려가려던 순간 계단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옥상. 시계를 보니 다들 이미 점심을 먹었을 시간이었다. 그래서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옥상 문을 열었다.
'누구지?‘
문을 열자 보이는 건 다름 아닌 한 남학생이었다. 단정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바람 따라 흔들리는 흰색 하복 셔츠는 여름날의 태양 빛을 받아 푸르게 보였다. 난간에 기댄 채 잠시 하늘을 바라보던 너는 이내 난간 너머로 몸의 무게를 실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떨어질 것만 같은데.
"야!“
아차,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여 팔을 잡았다. 괜한 짓을 했나 싶지만 누구든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을까. 몸이 굳으면 굳었지 구경하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나는 몸이 움직인 것뿐이고. 눈이 마주치자 너는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걸로 전부 설명이 되는 표정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그리움도 섞인 표정이었다. 너는 복잡한 표정을 거둔 채 짧은 웃음을 보였다. 왜인지 그 웃음은 눈물보다 씁쓸해 보였다.
"너 미쳤어?"
"그냥 아래 본 건데.“
너 같으면 믿겠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진정하고 말을 삼켰다. 더 물어본다고 솔직하게 대답할 것 같지도 않았고. 짧은 한숨을 쉬니 진정이 좀 되는 것 같았다. 일단 통성명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이 뭐야?"
"스나 린타로."
"그래 스나. 나는..."
"(-).“
당황한 나머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교복의 명찰이 있는지 한번 확인했다. 내가 당황할 걸 예상했다는 듯 질문도 하기 전 답변이 먼저 나왔다. 이어지는 말은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너 유명해. 체육관에서 자주 와서. 근데 린타로라고 불러줄래?"
"뭐?"
"그냥, 정 없어 보이잖아.“
원래 이렇게 넉살이 좋은 애인가. 그나저나 체육관에 자주 가는 건 어떻게 알았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뭐 이게 중요한가 싶었다. 이름으로 불러달라는 부탁 쪽이 더 당황스러웠으니까. 보통은 처음 본 사람에게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그렇게 불러야만 할 것 같았다. 왜인지 설명해 주고 싶지만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그쪽이 더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 수 없는 익숙함도 느껴졌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너는 만족한다는 듯이 웃음을 보이고 고개를 돌렸다.
"점심 먹고 심심하면 올라와. 사람 없을 테니까.“
*
다음 날도 옥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봐도 조금 이상하다 못해 웃긴다고 생각했다. 아는 것도 없는, 그저 어제 봤던 남학생에게 무슨 볼일이 있어서 올라가는 건지.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옥상 문을 열자 어제와 같은 행동을 하는 너의 모습이 보였다. 물론 떨어질 것 같이 행동하지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그런데 린타로, 너 몇 반이야?"
"1반."
"머네.“
지금껏 왜 못 만났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끝과 끝 반인 데다가 층수까지 달랐으니까. 체육관까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너네 반 가도 돼?"
"아니.“
나조차 당황스러운 질문이었으니 이 반응은 어쩌면 당연한 거겠지. 우리가 얼마나 봤다고. 반까지 찾아와서 이야기할 사이는 아니지 않나.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미안."
"그런 게 아니라 반에 가도 내가 없어.“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반에 없을 수 있다는 것도 아니라 반에 없다고? 하지만 이내 그냥 과격한 표현일 거라 생각했다. 이곳저곳 돌아다닐 만큼 바쁘다는 이야기일까. 그렇다면 매일같이 옥상에서 만나는 것도 어렵다는 이야기일까.
'... 그건 싫은데.‘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떤 대답이 올지 예상을 해서 그런 거겠지. 고민하고 고민하다 말을 뱉으려는 순간 종이 쳤다. 예비종이 아니라 수업종. 다음이 있을지 애가 타는 상황에서 이번에도 네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내일도 올 거지?"
"응, 올게.“
같이 내려가자고도 말해봤지만 너에게 반쯤 등 떠밀려 먼저 옥상 문을 열고 나왔다. 마치 며칠 전 내가 체육관에 같이 가자는 친구에게 했던 것처럼. 내려오는 동안 시끄럽게 반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계단에 붙어있던 거울을 보고는 빨개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 주저앉아 고개를 숙였다. 이런 적이 없어서 그런가 어떻게 대처해야 될지 감이 안 왔다.
'... 나 금사빠는 아닌데.‘
*
"너 좋아하는 사람 있지?“
훅 들어온 친구의 질문에 먹던 음료수를 그대로 쏟을 뻔했다. 딱히 좋아하는 사람은 없는...
'아, 스나 린타로.‘
순간 너의 이름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애써 부정하지도 않았지만 인정하지도 않았던.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오랜만이어서 잘 몰랐던 걸까. 생각에 잠긴 표정이 재밌었는지 친구는 한참을 바라보다 이어서 질문을 던졌다.
"누구야?“
이름 말고 다른 건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혼자 이러고 있다간 지치고 있을 것 같기도 했고,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면 마음이라도 편해질 것 같아서.
"며칠 전에 우연히 만난 애가 있는데.“
속 편하게 이야기했다. 약간의 거짓말을 섞기는 했지만. 그래도 장소만 집 근처 공원으로 바꾸었지 너와 나눈 이야기는 거짓말로 말하지 않았다. 물론 네가 몇 반인지와 체육관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했지만. 괜히 옥상이라고 말했다가 따라붙는 건 싫었으니까.
"음, 걔도 널 좋아하는지? 애매하기는 하네."
"걔 인기 많은 것 같아서."
"그럼 좀 떠봐."
"어떻게?“
몇 가지 조언을 들었다. 도움이 되었냐고 묻는다면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용기를 얻는 데는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린타로는 좋아하는 사람 있어?“
아차, 나도 모르게 본론부터 이야기해 버렸다. 너무 갑작스러운 질문. 부담스러워하는 건 아니겠지.
"있어."
"누구?"
"나처럼 운동을 좋아해. 그리고 밝아. 특히 웃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나인가 싶었다. 아니 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게 더 정확하겠지.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사람에게 해당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가 딱 좋았다. 적당히 망상할 수 있는. 묘한 표정으로 감정을 숨기고 있자 너는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리고 이내 질문으로 말을 이었다.
"너는 있어?"
"... 있어.“
너는 누구냐고 묻는 대신 웃음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잘해보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될지, 누구냐고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해야 될지 고민했지만 기우였다. 그 뒤에는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지만 옥상을 내려오면서는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일까’라는 생각만 몇 번이고 되뇄다.
*
너와는 자주 만날 수 있었다. 가끔 가본 1반에서는 너의 모습을 찾지 못했지만 점심시간이면 만날 수 있으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그래야만 했다.
아, 여담이지만 점심시간마다 시간을 빼는 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란 걸 느꼈다. 항상 가는 체육관을 매일 다른 이유를 대서 빠지는 게 쉬울 리 없으니까. 그렇다고 체육관을 가서 배구를 안 보는 것은 아니다. 그저 점심시간이 아닌 방과 후에 보는 것뿐.
나는 너에 대해 알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하나라도 더, 그리고 자세히. 그래서 최근 들어 사랑 앞에서는 물음표가 많아진다는 말에 동의하게 됐다. 이상하게 너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기시감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냥 오랜만에 하는 짝사랑의 어색함이라고 정의하기로 했다.
"린타로는 방과 후에 뭐해?"
"배구부 했어."
"체육관에서 너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예전에 체육관에 자주 와서 안다는 이야기는 이로써 해결이 됐다. 그런데 더 의문인 건 네가 배구부라는 것. 체육관 구경을 간지도 어느덧 3개월, 하지만 너를 본 적은 없었다. 자주 본 나머지 부원들의 이름과 얼굴까지도 기억할 지경인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거일리가.
"했었다고. 지금은 못 해."
"왜?"
"다쳤거든. 이제는 시간도 없고.“
무슨 죽을 사람처럼 이야기를 하나 싶었다. 치료 때문에 배구를 할 시간이 없다는 말일지, 다른 사정이 생긴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왜 저런 씁쓸한 표정을.
"괜한 이야기를 했나?"
"아니, 무슨 말을 해야 될지 정리가 안 돼서..."
"상관없어. 듣기만 해."
"그래도 린타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 그 좋아한다는 사람과 함께.“
무슨 말은 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충동적인 감정이었을까. 어쨌든 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처음 봤을 때 그 표정,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분명 그때와 지금의 나는 다른데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는 건 왜일까. 그리고 이번에도 네가 한발 빨랐다. 씁쓸한 웃음과 함께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하는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어.'라는 말은 다음을 위해 넘겨두기로 했다. 침묵이 이어지면 그냥 말을 꺼낼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말했으면 분명 후회했을 거니까.
방과 후, 오랜만에 친구들과 체육관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했다. 영화관, 노래방, 카페를 들러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길거리의 작은 상점. 평소에는 액세서리에 관심이 없었기에 친구들을 호응해 주느라 바빴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눈에 띄는 열쇠고리가 있었다. 여우 열쇠고리, 그리고 같이 달린 월계수.
'린타로랑 닮았어.‘
피식 웃고는 열쇠고리를 손으로 집었다. 여기까지 와서도 너를 떠올리는 걸 보니 나도 참 징하다고 생각했다. 저번에 내 이야기를 들은 친구가 감탄사를 뱉으며 툭툭 쳤지만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나에게 관심이 없었으면 점심시간마다 나를 기다렸을까? 처음 봤을 때부터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했을까?
'너도 날 좋아하는 게 아닐까?‘
어찌 됐든 이 짝사랑도 곧 끝이 보일 것 같았다. 비참하게도 내가 원하던 형태는 아니었지만.
*
'오늘도 없네.‘
나는 손에 든 열쇠고리를 만지작거렸다. 어제 샀던 여우와 월계수가 같이 달린 열쇠고리. 반에 없는 너의 자리를 찾으려고 반 앞을 기웃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자리라도 물어보는 건데. 그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누구 찾아?"
"아니야, 괜찮아!"
"너 몇 번이나 왔다가 그냥 갔잖아. 누구 불러줘?“
그랬다. 반을 기웃거리다 간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했다. 이 아이가 나를 적대적으로 대했다는 말은 아니다. 순전히 도와주고 싶어서 물어본 것 같았다. 호의를 무시할 수도 없고, 나도 헤매던 참이니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스나 린타로 자리가 어디야?"
"스나 린타로?"
"응."
"우리 반에 그런 애 없어.“
밖에 걸려있는 반 표시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2학년 1반, 네가 말한 교실은 여기가 맞다.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었기에 나는 몇 가지를 더 물어봤다. 전학 간 건지, 혹시 다른 반인지.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전학 간 게 아니라 애당초 그런 학생은 없었으며 다른 반까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라는 이야기. 혹시나 착각했나 싶어 여러 반을 돌며 질문했지만 답변은 모두 똑같았다.
"그런 애 없는데.“
옥상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의지와 상관없이 옥상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는 너의 공간은 옥상이었으니까. 당장이라도 장난이라는 대답을 받아야만 될 것 같았다. 무조건 네가 있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계속 바랐다.
'있어라, 있어라 제발.‘
그리고 우연인지 운명인지 문을 열고 가장 먼저 보이는 건 평소와 같은,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던 너의 모습이었다.
"린타로...!"
"표정이 안 좋네 (-).“
어째서인지 예상한듯한 표정이었다. 웃음으로 넘어가 보려고 하지만 티가 다 나는 표정. 너의 미소는 항상 그랬다. 씁쓸하면서도 공허한. 어쩌면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지 않을까.
"넌... 누구야?"
"스나 린타로."
"우리 학교는 맞아?“
빌었다. 제발, 제발 맞다고 해줘. 그럼 방금 듣고 왔던 말들은 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아니지. 지금은.“
간절히 빌면서 숙였던 고개를 급하게 들었다. 장난이겠지, 장난이어야만 해. 그래서 아니라는 대답까지 듣고도 약간의 희망을 버리지 못한 채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너의 표정이 말해주고 있었다. 거짓말이 아니라고.
눈물이 흘렀다. 어디서부터 거짓말인 거지? 아프다는 것부터?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부터? '스나 린타로'라는 이름부터? 대체 너에게 나는 뭐였길래. 나는 무슨 죄를 지었길래. 나의 진심을 담은 순간들이 이렇게 한순간에 부정당해야 하는 걸까. 아니, 애당초 말이 되는 일인가? 우리 학교도 아닌데 왜 여기에? 그것도 교복을 입은 채로? 하지만 그런 계산은 빛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남은 자리에는 너에 대한 원망이 다시 들어찼다.
"우린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네."
"..."
"네가 거짓으로 하나하나 꾸며낼 때 나만 진심이었던 거였네.“
떨어지는 눈물을 참으며,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한마디 한마디 쏘아붙였다. 제발 대답이라도 해줘라.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여도 믿을 테니까.
"그동안 거짓말만 하느라 고생 많았겠다, 너도."
"미안해. 너무 오래 붙잡고 있긴 했어.“
이게 서로를 향한 대화인지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마치 벽에다 대고 말하는 기분. 너의 대답은 이상하리만큼 뜬금없었고 이상하리만큼 진심이 담겨있었다.
"시간이 없으니까 잘 들어."
"장난하지 마.“
하지만 너는 들은 척도 안 하고 앞으로 다가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정확히는 아무것도 듣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결국 너의 말을 끊은 채 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야... 적당히 해. 나는 너 때문에 점심시간마다 옥상에 올라왔고, 방과 후에는 네 생각이 나서 열쇠고리도 샀어. 그리고... 그리고 나는 진짜로 너를 좋아했는데...“
타이밍이 엉망이었다. 저번에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훨씬 나았을 정도로. 무슨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냥 너무 답답했다. 이야기하지 않으면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너를 주먹으로 쳐도 풀리지 않는 답답함에 충동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 제발...“
너는 한동안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너의 품에 안긴 나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아까와는 다른 개념이었다. 정말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다. 너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숨소리, 그리고 심장이 뛰는 소리까지.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너는 나와 눈을 마주치기 위해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내가 본 너는 눈물로 가득 찼지만 웃으려고 애쓰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조금은 달랐다. 지금까지처럼 울 것 같은 게 아니라 약간은 홀가분한, 그러면서도 아쉬움이 담긴 표정.
"마지막으로 그 말이 듣고 싶었어."
"..."
"나도 좋아해. 나도 좋아해, (-).“
푸른 하늘이 갈라졌다. 맞잡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눈앞에 너는 여전히 씁쓸하게 웃고 있었고 나는 점점 눈이 감겼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았다. 나는 홀린 듯 눈을 감았다.
.
.
.
삐-
눈을 뜬 곳은 병원. 내 손을 잡고 울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고 심장이 멈춘 것을 감지한 시끄러운 기계 소리가 들렸다. 죽은 건가. 사고가 멈춘 느낌이라 정리가 안 됐다. 그저 지금 이 상황을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런데 죽은 건 내가 아니었다. 멀쩡히 움직이는 내 팔, 나를 보며 놀란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 소리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었다.
'그럼 대체...‘
그 순간 머릿속을 지나간 한 사람. '스나 린타로'. 마지막 기억이 돌아왔다.
너와 하교하던 여름날이었다. 그리고 정말 야속하게도 내가 너에게 고백해야겠다고 다짐한 날. 우리는 끝이 보이는 여름을 마무리하기 위해 아이스크림을 들은 채 걸었다. 신호등만 건너면 우리 집,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렸고 초록 불이 들어오자마자 나는 건너기 시작했다.
"린타로, 신호등 바뀌었..."
"(-)!!“
너의 소리치는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내 눈에 보이는 큰 트럭, 왜인지 밝게 켜져 있는 라이트. 나의 발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너는 나를 밀어 억지로 굳은 내 발을 떼어냈다. 순간적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발이 붙어있던 그 자리에 네 발이 붙어있었다. 귀가 찢어질 것 같은 브레이크 소리와 들려오는 사람들의 웅성거림. 그게 기억의 끝이었다. 설마.
"환자분! 그렇게 일어나시자마자...!!“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모두의 손을 뿌리치고는 분주하게 사람들이 오가는 옆 커튼을 열었다. 그 소리의 주인공은 가장 아니었으면 했던 사람. 너였다, 스나 린타로. 그제야 돌아오지 않았던 기억, 꿈에서의 기억까지 돌아왔다. 그리고 조각처럼 맞춰지기 시작했다. 네가 왜 옥상에만 있었는지. 그리고 꿈속에서 너는 왜 모든 걸 과거형으로 말했는지.
"눈 떠 린타로...“
너와의 기억은 아무 생각을 안 해도 점점 선명해졌다. 처음 너를 봤을 때, 제발 짝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을 때, 몇 번이고 고친 뒤에야 겨우 메시지를 보냈을 때. 그리고 네가 나를 좋아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때까지. 그런데 그 끝이 겨우 이거라니. 너와의 추억을 담은 스케치북이 예고도 없이 물에 빠진 것 같았다. 급하게 잡아 올려보지만 이미 색끼리 뭉쳐져 온통 검은색이 돼버렸고 형태조차 알아보기 힘들게 됐다. 지푸라기 같은 희망을 버리지 못한 채 들고 있어도 소용없었다. 어떤 노력을 해도 하루가 다르게 변색되어 가니까. 그리고 나는 그걸 지켜볼 수밖에 없으니까. 세상 무력하게도.
그러니 한 번만, 한 번만 네가 더 눈을 뜬다면 미루지 않을 텐데. 현실은 왜 이렇게 잔인한 걸까. 어째서 우리는 거짓 세계에서만 고백할 수 있었던 걸까. 꿈은 반대라는 이야기까지 미워지는 건 왜일까. 어쩌면 마지막으로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너의, 아니 우리의 염원이 만들어낸 세계였던 걸지도 모르겠다. 어떤 세계여도 상관없으니 기회를 달라는 우리의 염원이 만든.
그렇게 여름과 함께 네가 떠났고 가을과 함께 내가 깨어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