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메이트
w. 쿠키(@c00ki2y)
“아 엄마 나 쟤랑 살기 싫다고…!!”
“린타로도 너랑 같은 대학이라잖아~ 더 친해지고 좋지 뭐. 엄마도 린타로니까 괜찮다고 하는 거야. 애가 얼마나 착해.”
15분 정도 전화를 하고 방 밖으로 나왔다. 전화라기엔 그냥 말다툼이었지만 아무튼… 방 밖으로 나오니 소파에 앉아서 핸드폰 톡톡 두드리고 있던 스나가 고개 들고 날 빤히 쳐다보고 있다. 그니까 지금 상황이 대학 입학 기념으로 친구들이랑 여행 갔다가 돌아오자마자 새로 살 자취방에 무거운 캐리어 열심히 끌고 왔더니 내 해피해피 자취방에 스나 린타로가 있고 난 앞으로 쟤랑 같이 살아야 된다는 상황인데. 이게 말이 되나?
기대되는 마음으로 심호흡까지 하고 집 소개할 때 빠질 수 없는 배경음을 직접 입으로 내면서 문 열고 들어갔더니 편한 추리닝 차림으로 물 마시고 있는 어렸을 때부터 봐서 살짝 스치듯 봐도 바로 알 수 있는 익숙한 남자애, 스나가 있었다. 내가 문을 잘못 열었나? 비밀번호는 0125 이게 맞는데... 니가 왜 여기 있냐는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스나는 이미 내가 올 걸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고, 놀란 건 나뿐이었다.
“너 왜 여기 있어?”
“얘기 못 들었어? 우리 이제 같이 살아.”
“누구 마음대로?”
“부모님들 마음.”
말하는 게 너무 여유로워서 혹시 내가 들었는데 까먹은 건가 싶어서 잠깐 가만히 서서 생각도 해 봤는데, 아니다. 난 이거 들은 적 없어. 바로 내 방이라고 가리키는 데로 돌진해서 문 닫고 엄마한테 전화 걸어서 15분 정도 나 쟤랑 못 살아, 혼자 살게 해준다며, 이런 게 어디 있어, 린타로라서 괜찮다, 자취하면 된 거다, 이런 게 여기 있다 뭐 이런 대화만 하다가 방 밖으로 나온 거다.
스나 린타로. 부모님들끼리 친하다는 이유로 태어날 때부터 강제적으로 친하게 지내야 했다. 초등학교 땐 집이 가깝다는 이유로 무조건 등하교를 같이 해야 했고 학교 끝나고 의미 없이 가는 뚱땅뚱땅 피아노 학원도 같이 가야 했다. 생긴 건 세상 모든 일 다 귀찮아서 대충하다가 금방 그만 둘 것 같이 생겼으면서 어렸을 때 배워두면 좋다는 뚱땅뚱땅 피아노도 그 얇고 긴 손가락으로 멋진 선율을 뽑아내버려서 상까지 타고 키 좀 크라고 시작했던 배구도 잘해버려서 고등학교 때는 배구부로 이름도 날렸다. 남들이 보면 못하는 거 없고, 잘생기고, 키도 크고, 몸도 좋은 아주 완벽한 남자겠지만 나한테 스나 쟨 그냥 피곤하게 사는 애다. 저거 다 착한 척, 괜찮은 척하는 거라고.
겉으로는 얌전한 척하면서 뒤로는 여자애들 갈아치우고 있는데 그걸 아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 속이는 거 보면 나도 충분히 잘 속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왜 난 널 다 알고 있어야 하는데? 애초에 처음부터 이 놈은 날 속일 생각이 없어 보이긴 했다. 여우짓이란 여우짓은 다 하면서 날 꼬드기고 은근슬쩍 놀려먹는데 다른 애들은 이 놈의 이런 모습 절대 상상도 못할 거다. 그냥 진짜 존재감 없이 조용히 자기 의견 없이 다른 애들한테 휘둘리고 다니는 호구처럼 다니니까… 사람들 다 얘 취미가 사람 호구 만들기인 걸 알아줘야 한다니까.
문제는 내가 쟤를 좀 오랫동안 좋아하고 있다는 거다. 내가 생각해도 웃겨 죽겠다. 태어날 때부터 친하게 지낸 소꿉친구를 싫어하면서 좋아한다는 게 그냥 말장난 같고 웃기기만 하니까. 아마 고등학교 때부턴가 배구부 매니저를 하기 시작하면서 스나랑 더 자주 붙어 있다 보니 여우짓을 겪는 빈도도 많아졌고 짜증 나게 자꾸 꼬셔대니까 진짜 어쩔 수 없이 넘어간 거다. 어쩔 수 없이.
근데 여기서 더 중요한 건 우린 그냥 아무 사이도 아닌 친구다. 나한테만 숨기는 거 없이 다 보여주면서 잘해주고 꼬셔대도 좋아한다거나, 사귀자거나 이런 말 하나 없었다. 화이트데이 때 사탕 같은 선물들은 꼬박꼬박 챙겨주면서 정작 분위기 있는 크리스마스 때는 안 만나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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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방 준비 같은 거 생각하지 말고 편하게 여행 다녀오라는 말을 믿으면 안 됐다. 아무런 의심도 없이 신나게 놀다 오니까 이런 상황이고, 마음에 안 들면 직접 집 구해서 살으라는데 내가 지금 돈이 어딨어. 그냥 여기 살아야지…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스나는 소파에, 난 바닥에 앉았다. 내가 그냥 맨바닥에 앉는 걸 보더니 “왜 바닥에 앉아.” 하면서 얘도 내려와서 나처럼 방바닥에 앉더니 “이렇게 마주보는 거 오랜만이네.” 하면서 또 저 미소를 짓는다. 여자들 꼬실 때 나오는 저 특유의 미소.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한 번도 안 봤으니 오랜만이긴 한데 달라진 건 딱히 없었다. 얼굴은 여전히 뭔가 의욕이 없어 보이는 무심한 표정이고, 핸드폰 두드리고 있는 손은 피아노 치던 거 티 내는 건지 길고 얇은데 굳은 살도 조금 있어서 배구했던 티도 내고 있었다. 앉아 있는데도 키가 엄청 크겠다 싶을 정도로 다리가 툭 튀어나와 있고 덩치는 또 엄청 커서 그냥 티 하나 걸쳤는데도 몸 좋은 게 딱 보였다. 난 한참을 스나를 쳐다보다가 한숨을 한 번 쉬고 물었다.
“종이랑 펜 있어?”
“응. 왜?”
“좀 갖고 와주라. 우리 규칙 정하자.”
규칙 정하는 데 딱히 시간이 많이 걸리진 않았다. 그냥 내가 먼저 규칙을 말하고 괜찮냐고 물으면 스나가 “응. 괜찮다.” 하는 느낌. 뭔가 오냐오냐해주는 거 같아서 좀 열이 받긴 했는데 괜히 다른 소리하면 또 얼굴 들이밀고 “응?” 이러면서 여우짓할까 봐 내 심장을 위해 참았다.
1. 말 없이 다른 사람 데려오지 않기
2-1. 빨래는 날짜 정해서 번갈아서 하기
2-2. 속옷은 각자 눈에서 모자이크 처리하기
3. 정한 구역 제대로 청소하기
4. 설거지는 각자 알아서 하기
5. 방 함부로 침범하지 않기
6. 같이 사는 거 절대! 비밀 유지
6번에는 중요하다고 별표도 쳐놨다. 아무리 친구라고 같이 산다는 게 알려지면 괜히 귀찮은 소문 퍼질 게 분명하니까.
“이거 규칙 꼭 지켜야 된다. 안 지키면 사형.”
“응, 사형.”
스나가 갑자기 내 손목을 잡더니 손을 끌어와서 자기 새끼손까락이랑 내 새끼손가락을 꼬았다. 엄지도 야무지게 한 번 꾹 누르고… 난 또 굳었다. 새끼손까락 꼬는 그 순간부터 머리가 하얘졌다. 얘는 당황한 날 보고 즐기는 것처럼 또 그 특유의 미소를 짓더니 “일찍 자, 여행 갔다 와서 힘들 텐데.” 하고 지 방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미친… 상여우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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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하고 스나는 전처럼 조용히 순한 척을 하고 다닌다. 얼굴이 평범하지 못해서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몇 있긴 했지만 애 반응이 워낙 무미건조해서 금방 흥미를 잃었다. 난 친구도 사귀고 열심히 놀러 다니고 대학교에 적응도 하고 있다. 가끔씩 집에 놀러 가면 안 되냐는 애들한테 매번 핑계를 대면서 거절하는 게 귀찮은 거 빼면 처음에 걱정한 것보단 꽤 잘 지내고 있다. 아마 새벽에 누가 우리집 문을 두드리지만 않았어도 난 계속 잘 지낼 수 있었을 거다.
과제 폭탄을 맞아서 새벽까지 과제를 하고 있었을 때였다. 밖에서 희미하게 누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시간이 너무 새벽이고 벨도 있는데 굳이 두드리진 않을 것 같아서 잘못 들었구나 생각하고 방 안에서 계속 과제를 하는데 또 쿵쿵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건 진짜 잘못 들은 게 아니다 싶어서 밖에 나가서 인터폰으로 확인해 보는데 처음 보는 여자가 문을 두드리고 나와 보라고 난리도 아니었다.
잘못 찾아온 것 같다고 말해야 될 것 같아서 현관으로 가는데 뒤에서 갑자기 스나가 나왔다. “들어가 있어. 내가 아는 사람이야.” 하더니 자기가 문을 여는데 여자는 진짜 스나를 보자마자 “야~ 너 나 바람 맞히면 어떡해~!” 하면서 달려들었다. 말투랑 움직이는 거 보면 확실히 취한 게 맞고 저렇게 안기는 거 보면… 여자친군가?
스나는 급하게 현관문을 닫았고 내가 본 마지막 장면은 스나가 자기한테 달려드는 여자를 받아주는 장면이었다. 갑자기 너무 괘씸해졌다. 너무 괘씸해서 죄 없는 문을 한참 동안 째려보다가 내 방으로 들어갔다. 다시 책상에 앉아서 과제를 하려고 하는데 도저히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여자친구가 있어? 왜 나한테 말 안 하는데? 아니 나한테 말할 필요는 없지. 그래, 짝!!사랑하는 내 잘못이지. 아니 근데 저 새끼가 먼저. 아니야 진정해. 어차피 쟨 그냥 흘리고 다니는 나쁜 놈이고, 아 몰라… 악!!!”
밤을 샜다. 과제를 하느라. 정확히는 스나 저 새끼 때문에 심란한 머리로 과제를 하느라. 강의를 듣는 내내 집중이 되질 않았다. 어제 스나 품 안에 쏙 안기던 여자가 자꾸 생각나서. 생각을 안 하려고 박하사탕 하나 입에 굴리고 눈을 부라리면서 강의를 듣는데도 계속 생각이 났다. 여자의 생김새, 차림새, 목소리, 뭐 쓸데없는 생각을 계속 했단 소리다. 하루 종일 머리에 그 여자가 폭, 안기면 스나가 싹, 안아주는 그 장면이 리플레이됐다. 여태껏 걔가 다른 여자를 꼬시는 건 많이 봤어도 그렇게 직접 가까이서 안아주는 그딴 건 본 적이 없었다고. 그래서 더 짜증 나고 계속 생각이 난다고. 이럴 때 답은 술이지. 술이야. 응…
친구들 끌어모아서 “오늘 달려 보자~!” 하고 마시는데 친구들 중에 눈치 빠른 애들은 무슨 일 있는 거냐고 계속 물어봤다. 생각해 보니 내 상황을 말하면 내가 스나랑 같이 산다는 것도 알게 될 거고 그럼 내가 우려했던 그 이상한 소문 팡팡 터지는 그런 상황이 생기면서 지금보다 더 끔찍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무것도 없다고 구라를 치면서 막 마셔댔다. 규칙 꼭 지키자고 손가락 꼬았던 것도 있고…
근데 술을 너무 많이 마셔버렸다. 아주 제대로 취해버렸단 뜻이다. 어지럽고 속 안 좋아서 죽을 것 같은데 데려다주겠다고 집 어디냐고 묻는 친구들 말에는 ‘절대 말하면 안 된다!’ 라는 생각에 입 꽉 틀어막고 “몰라!!ㅠㅠ” 이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핸드폰 꺼내 보면 ‘스나 린타로’ 이름이 적혀 있다. ‘뭐야… 얘가 왜 나한테 전화하는데…’ 생각하고 거절하려는데 옆에서 “스나 린타로??” “얘가 왜 너한테 전화를 해?!?!”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 개망했네…’ 하고 그냥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밖에. 왜.”
“그니까 어디, 너 술 마셨어?”
“어. 왜.”
“주소 불러. 데리러 갈게.”
어이없는 새끼… 지가 뭔데 나 데리러 와? 사실 어제부터 스나를 피하고 있다. 정확히는 오늘 새벽 2시쯤에 있었던 그 일 이후로 피하고 있다. 아침에도 마주치기 싫어서 개빠르게 준비해서 나왔고 잠깐 할 말 있다고 만나자고 하는 문자도 다 씹고 있었다. 되게 웃긴 상황이긴 해. 내가 쟤랑 사귀고 있던 것도 아니고 썸을 타고 있던 것도 아닌데 다른 여자랑 있는 거 보고 괜히 삐쳐서 나 혼자 성질 내고 있는 거잖아.
“다른 애들 있어서 애매해.”
“시간 늦어서 위험해.”
“니가 뭔 상관이야.”
“빨리.”
옆에 있는 애들 눈치 보면서 작은 목소리로 통화하는데 열받아서 큰소리로 화딱지 낼 뻔한 걸 겨우 참았다. 니가 뭔데 날 데리러 오냐고, 니가 뭔데 날 챙기냐고, 니가 뭔데 날 걱정하냐고!!! 아무것도 없는 그냥 친구 사이에, 심지어 저 새끼는 내가 지 좋아하는 거 알 텐데 이렇게 구는 거 그냥 어장관리 아니면 날 갖고 노는 거 아니면 내가 만만한 거 아니면 뭔데!!!
결국엔 데리러 온댄다. 기다리는 동안 애들이 무슨 일이냐고 묻는데 “아~ 내가 사실은 얘랑 같이 살고 얘를 좋아하는데 얘가 글쎄 어제 새벽에 찾아온 여자를 포옥~ 안아줬지 뭐야? 내가 그게 너무 화가 나서 연락 다 씹고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뭐 이러면서 얘기할 수도 없잖아. 나중에 설명하겠다고 대충 둘러대고 집으로 가는데 사람들 많은 데서 나온 지가 한참 됐는데도 얘가 내 손목을 놓질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뿌리치기엔 은근 손 잡고 같이 걸어가는 느낌이라 그냥 계속 그렇게 붙잡힌 채로 집까지 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내 방으로 도망가려고 급하게 신발을 벗고 있는데 스나가 “잠깐 얘기 좀 해.” 하더니 소파에 앉았다.
누가 보면 내가 바람피다가 걸려서 혼나는 상황인 줄 알겠다. 난 눈치만 보면서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되냐고…’ 하고 있고 쟨…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전혀 모르겠다.
“왜 나 피했어?”
“안 피했는데.”
“내 연락 계속 안 봤잖아.”
“무음이었어.”
“확실해?”
“…”
얘 앞에서는 거짓말을 못하겠다. 거짓말을 해도 이미 사실을 다 알고 어떻게 말하나 보자 이런 느낌이라 진짜 전혀 거짓말을 못하겠다. 집안은 조용하고 난 죄지은 사람처럼 눈치만 보면서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왜 피했어?”
“…”
“말 좀 해주라. 왜 피했어?”
“… 짜증 나, 너. 나 갖고 놀아?”
“응?”
“너 여자친구 있었어? 근데 왜 말 안 했어? 아니 꼭 말해야 되는 게 아니긴 한데, 그래도. 넌 여자친구도 있는데 나 그렇게 꼬시기나 하고. 맨날 챙겨주고 진짜 좋아하는 것처럼 굴고… 근데 좋아한다고는 절대 안 하고 맨날… 하씨 그냥 나쁜 새끼…”
언젠가 한 번은 꼭 물어보고 싶었던 것들이었다. 물론 이렇게 술김에 와다다 랩하듯이 말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지만. 빠르게 울분을 토하고 째려보고 있는데 이 새끼는 다 듣더니 “아.” 한 번 하고 피식 웃었다. 피식? 날 비웃는 게 분명했다. 이 자식은 날 가지고 놀고 있는데 내가 이렇게 거의 울다시피 말하는 게 그냥 재밌기만 한 거겠지.
“야… 웃음이 나와?” 물어봄과 동시에 억울한 감정이랑 속상한 감정이 몰려오면서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아씨 나 이렇게 쉽게 우는 여자 아닌데. 이거 술 때문에 그런 거다. 생각하면서 참으려고 하는데 계속 눈물이 났다. 앞에 있는 이 새끼 얼굴을 볼수록 눈물이 더 났다. 난 왜 이런 놈을 좋아해서… “아 진짜 짜증 나…” 하고 계속 울고 있는 나를 몸 완전히 내 쪽으로 돌려서 구경이라도 하는지 가만히 쳐다보다가 “나 봐봐.” 하고 손으로 내 고개를 들게 했다.
이 자식 필살기다. 눈 마주치기. 이번에는 진짜 안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에 계속 눈 안 마주치고 피했는데 “내 눈 좀 봐봐.” 하고 그 뒤로 아무 말 없이 진짜 내가 눈 마주칠 때까지 나 잡아놓고 기다렸다. 결국엔 내가 또 져서 슬금슬금 눈을 마주치니까 그제서야 입을 다시 열었다.
“여자친구 아니야. 그냥 아는 지인이야. 너 갖고 노는 것도 아니야. 나 너 가볍게 생각 안 해. 좋아하는 것처럼 구는 것도 아니야. 나 너 좋아하니까.”
“… 뭐? 너 또 나 가지고 노냐?”
“아니야. 진짜 믿어줘. 너 좋아해.”
“그럼 지금까지 왜 말 안 하고 있었는데?”
“너 당황하는 게 귀여워서.”
“내가 다른 사람 좋아하게 되면 어쩌려고?”
“안 그럴 것 같던데?”
재수없는 새끼.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자신감 있는 게 재수가 없다. 맞는 말만 해서 재수가 없다. 재수가 없어서 짜증이 나는 거랑 여태까지 저 놈 때문에 나 혼자 끙끙 앓으면서 안 좋아졌던 기분들이 나를 좋아한다는 말 듣고 바로 다 풀려버렸다. 눈치 빠른 이 자식은 내가 기분 풀렸다는 걸 바로 알아챘는지 은근히 내 옆으로 붙어왔다.
“꺼져. 재수없어, 너.”
“사귀자.”
“꺼지라니까.”
“사겨줘.”
“싫어.”
“좋아해.”
몇 년 동안 그렇게 듣고 싶던 말을 지금 실컷 듣고 있는데 너무 좋아서 기절할 것 같다. 내가 밀어내는데도 계속 달라붙으면서 좋아한다고, 사귀자고 말하는데 아무리 표정 관리를 하려고 해도 되지가 않는다. 그리고 얘는… 기분 좋게 웃고 있는 거 보면 내 반응을 즐기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한참을 사귀자, 꺼져로 실랑이하다가 대답했다. 나도 좋다고. 내 말을 들은 스나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짓더니 나를 끌어안았다.
“아, 이렇게 안으니까 너무 좋다. 괜히 시간 끌었나. 빨리 고백할 걸.”
이것도 그냥 나 놀려먹는 말 아닌가 싶어서 스나 품에서 빠져나와 표정을 빤히 보는데 진짜 기분이 좋아보였다. 이건 진심이 확실했다. 그날 한참을 스나한테 안겨 있다가 잠에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스나가 없다. 뭐지. 나 꿈 꾼 건가? 하는 생각에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는데도 스나가 없다. “뭐야… 진짜 꿈이야?”하고 혼자 투덜대고 있는데 방문이 열리고 스나가 들어왔다. “잘 잤어? 눈이 팅팅 부었네.”하더니 침대 옆으로 와서 쭈구리고 앉더니 침대에 누워 있는 나랑 눈높이를 맞췄다. 가만히 누워서 눈만 꿈뻑이고 있는 나를 보더니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짧게 뽀뽀를 한 번 했다. 내가 밀어내면서 아침부터 이러지 말라고 하니까 “귀여워서 어쩔 수 없었다~”하면서 짧게 웃었다. 이 자식 또 나 놀려먹고 있어.
한참을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놀다가 여유롭게 밥도 다 먹고 나른해진 채로 소파에 다시 누웠다. 스나는 누워 있는 날 보더니 바로 내 쪽으로 와서 안 그래도 좁은 소파에 굳이 그 큰 몸 구기고 들어와서 나한테 달라붙었다.
“야, 좁아.”
“그럼 더 붙어야겠다.”
내가 좁다고 밀어낼수록 팔로 내 허리를 감싸 안으면서 달라붙었다. 우리는 그 상태로 한참을 뒹굴거리다가 낮잠도 자고, 영화도 보고, 간식도 먹으면서 보통 커플들처럼 홈데이트를 했다. 하루 종일 놀고 다시 밖이 캄캄해지고 잘 때쯤엔 얘가 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왜 들어와?”
“나 혼자 재울 생각이었어?”
“뭔…”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니까 “그 표정 귀엽다.” 이러더니 내 침대로 파고 들었다. 침대가 넓지도 않은데 이렇게 덩치 큰 놈이 들어오니까 좁아터질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딱 붙어 있어야 했다.
“불편해. 저리 좀 가.”
“내 위에서 잘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댔다.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니까 뭐가 좋은지 스나도 웃었다. 딱히 재밌지도 않는 일인데 계속 웃음이 났다. 기분이 좋아서 그런가. 잠들기 전까지 도란도란 얘기를 했다. 사실 난 거의 앞담이었다. 너 진짜 재수 없다고. 여우 같아서 화난다고. 스나는 내가 투덜대는 거 하나하나 다 들어주다가 나를 확 껴안았다.
“난 화 안 나. 그냥 니가 좋아.”
“야, 그러면 내가 뭐가 돼.”
“뭐가 되긴, 여자친구 되는 거지.”
“… 잠이나 자.”
“자기야 잘 자.”
그날도 난 스나 린타로 품에 꽉 안겨서 잠에 들었다. 앞으로도 쭉 난 얘 품 안에 갇혀서 잠에 들겠지.

